얼마 전 지인이 페이스북에 소개한 스콘을 사러 한 인터넷쇼핑몰에 들렀다. 취나물처럼 특이한 우리 농산물을 사용해 빵을 굽고, 정기배송에 다회용기를 사용하고 다음 번 배송 때 회수한다는 게 호기심을 자극했다. 상세설명을 읽다가 한 부분에서 눈이 멈췄다. 토종밀인 ‘앉은뱅이밀’을 쓴다는 거다.
문득 딸아이 어릴 때가 생각났다. 유치부 어린이예배의 주제가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우신 예수'였을 때다. 휠체어를 타는 아이 앞에서 '앉은뱅이' 우화라니. 게다가 ‘부족하고 결함 많은 앉은뱅이 몸’을 ‘고친다’는 맥락을 수십 명의 다른 아이들이 들어야 한다니. 그렇잖아도 주위에서 "걔는 언제 걷는다니"라는 질문에 "이건 영구적 장애래요"라고 굳이 말해야 하는 상황에 한숨이 나는데. 예배 후 답답한 마음에 주일교사를 붙잡고 “저희 아이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요?”라고 물었다. 선생님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다시 물었다. “휠체어 타는 아이 앞에서 저렇게 장애를 기적으로 고친다는 건 적어도 전체 예배에서는 안 다뤄 주시면 안 될까요?”
이후 교회 내부에서 논의가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답변을 듣지 못했으니까. 다만 그때의 기억 때문인지 딸아이는 자신이 ‘무교’라고 이야기하고 다닌다.
‘앉은뱅이’라는 말이 당시 우리 가족에게만 콕 박혔던 건 아니었나 보다. 4월 장애인권법연구회 대표인 김예원 변호사가 앉은뱅이밀이라는 토종밀 이름을 변경해 줄 수 있느냐고 농촌진흥청에 공개 서한을 보냈다. 척추기형을 가져 휠체어를 타고 키가 작은 아이가 이 밀의 이름을 듣고 속상해 운다는 사연을 김 변호사에게 전해 왔다며. 농촌진흥청에서는 이 요청에 화답해 이름을 변경하기로 했다.
쇼핑몰에 메시지를 보냈다. 농진청에서도 이름을 바꿀 계획이라고 하니 ‘앉은뱅이밀’ 대신 그냥 ‘토종밀’로만 표기해도 되지 않겠느냐고. 한번 검토해 달라고.
그런데 빛의 속도로 답변이 왔다. “논란에 대해 들었습니다. 내부 논의 끝에 이 이름을 바로 수정하기보다는 토종밀 이름이 어떻게 앉은뱅이밀이 되었는지 그 기원과 앉은뱅이밀 외에도 누군가에게 상처가 될 표현을 사용하는 경우를 고객들과 함께 생각해 보자고 결정했어요. 그래서 스콘을 사셨던 분들께는 포장 박스 안에 안내문구를 보냈어요. 곧 SNS에도 전체 공개하려고 합니다.”
만약 그때 주일학교에서 스콘을 굽는 이 쇼핑몰만큼만 성의 있게 대응했더라면 어땠을까. 딸아이가 아직 교회에 다니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모든 인간을 차별 없이 사랑하자고 예수님이 가르쳤다는 걸 정말 믿을 수 있지 않았을까.
김지혜 교수의 책 제목을 인용하자면 우리 모두는 ‘선량한 차별주의자’다. 일상에서 차별인지 모르고 무심코 말을 내뱉고 행동을 할 수 있다. 비단 장애뿐이랴. 피부색이 다른 사람들을 대상화하고 비하하는 말, 출신지역이나 특정 연령-성별-성정체성 그룹을 싸잡아 혐오 대상화하는 말은 쓰지 않았는지.
장애 관련 활동을 하는 나도 수백 가지가 넘는 모든 장애를 다 이해할 수는 없기에 실수할 수 있다고 늘 생각한다.
주문한 스콘을 먹으면서 생각한다. 인간이 위대한 동물인 이유는 오류가 없는 ‘무오(無誤)’의 존재라서가 아니다. 오류를 저지르고 무지할 수 있지만 그걸 인지했을 때 고쳐 나가기 때문이다. 나는 무지함을 붙잡고 있는 존재인가. 무지함을 인정하고 스스로의 행동을 고칠 수 있는 존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