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자감은 여와 야, 누구 것일까

입력
2021.06.17 18:30
26면
보선 압승에 30대 대표 배출한 보수야권
긴 열패감 벗고 승리공식과 자신감 회복
진보여권은 전략 비전 없이 느긋한 모습

국민의힘이 근래 얻은 가장 큰 소득은 선거에서 이기는 방법을 알아냈고,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회복했다는 거다. 10년 만의 서울시장 탈환이나 헌정사상 첫 30대 당대표 배출 같은 가시적 결과물들은 그에 비하면 오히려 부차적이다.

지난 5년간 보수는 전국 선거에서 이긴 적이 없다. 내용상 졌지만 결과는 무승부였던 2014년 지방선거는 빼더라도, 2016년 총선부터 2017년 대선, 2018년 지방선거, 작년 총선까지 내리 4연패를 당했다. 당 간판을 세 번이나 교체(새누리당→자유한국당→미래통합당→국민의힘)해도 소용이 없었다. 말은 많은데 행동은 없고, 분노만 넘치지 비전은 없는, 참 못난 정당이었다.

작년 여름이었다. 태극기 집회에 열성이던 자칭 '애국보수' 선배에게 물었다. 코로나도 심한데 뭐하러 이 뙤약볕에 광화문까지 나가냐고. 문재인 정부가 꼴 보기 싫으면 선거로 심판하면 되지 않냐고. 그러자 선배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안 될 것 같으니까 더 화가 나서 이러는 거야. 우파는 인물도 전략도 없잖아. 야당은 한심하고. 결국 머리 좋은 좌파가 또 집권할 게 뻔해." 열패감에 찌든 모습이었다.

올 초만 해도 국민의힘은 인물 없다는 얘기만 계속했다. 다들 야권 서울시장 후보는 보나마나 안철수가 될 거라고 했다. 그런데 약체였던 오세훈이 나경원을 누르고, 안철수도 누르고, 마침내 박영선까지 압도적으로 누르자 분위기는 확 바뀌었다. 정권심판론 덕인지, 김종인의 마법인지는 두 번째 문제다. 선거에서 이겼다는 것, 그리고 이겨나가는 과정이 중요했다.

지난 대선을 보자. 아무리 탄핵 후 몰락 지경이었다 해도 범보수진영은 영남보수=홍준표, 개혁보수=유승민, 실용보수=안철수로 갈가리 찢어졌다. 그런데 이번엔 이들이 다 뭉쳐 오세훈을 당선시켰다. 결국 보수진영은 보궐선거를 통해 뭉치면 이길 수 있고, 뭉칠 땐 꼭 당과 중도 중심으로 모여야 한다는 승리공식을 마침내 체득하게 되었다.

당대표 선거도 그 연장선상이다. 나에게 이준석의 장점 세 가지를 꼽으라고 한다면 첫째, 60대가 아니고 둘째, 50대도 아니며 셋째, 40대마저 아니라는 점을 들겠다. 정치입문 후 10년여간 이준석이 보여준 폴리테이너적 행보는 분명 풀뿌리 청년 정치나 희생·절제를 강조하는 보수의 미래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지만, 젊음이 최고 미덕이 되고 세대교체가 거역불가의 바람이 되니까 단번에 제1 야당 대표 타이틀을 거머쥘 수 있었다. 이준석의 당선이 중요한 게 아니다. 보수가 맘만 막으면 어떤 바람도 일으킬 수 있고, 진보도 엄두내지 못한 파격적 실험까지 먼저 할 수 있게 됐다는 게 핵심 포인트다. 시도하고 변화하고 승리하니까 전광훈의 목소리가 작아지고, 그 많던 극우유튜버들도 하나씩 자취를 감추게 된 것이다.

국민의힘에 비해 더불어민주당은 참 여유로워 보인다. 보궐선거 참패와 야당 전당 대회 효과에 흠칫 놀라는 표정이지만, 여전히 "그래도 우리가 질 리는 없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윤석열-이재명의 양자 대결에서 오차범위 밖 패배를 점치는 여론조사가 나오는데도 그렇다. 윤석열과 장모를 너무 믿어서일까, 계속 '제2의 반기문' 얘기만 반복한다. 180명 국회의원들은 정권임기는 1년뿐이지만 내 임기는 3년이나 남았다고 생각해서인지, 등 돌린 중도진보와 젊은 층을 향한 어떤 전략과 비전도 내놓지 않고 있다.

물론 인물경쟁력이 절대적인 대선은 분명히 다를 것이다. 내년 3월까지 무슨 일이 벌어질 지도 모른다. '이젠 우리도 이길 수 있다'는 야당과 '설마 우리가 질 리 없다'는 여당, 둘 다 승리를 얘기하고 있지만 과연 어느 쪽이 근자감(근거 없는 자신감)이 될까.

이성철 콘텐츠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