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과로사 9분의 1로 축소됐다" WHO·ILO보고서 분석한 용혜인

입력
2021.05.30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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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혜인 의원실, WHO·ILO 공동보고서 분석]
같은 해 정부가 과로사 인정한 수는 300명
용혜인 "장시간 노동 정의하는 기준 차이 커"
WHO·ILO는 10년 잠복기 이후 발병도 인정

"우리 통계는 장시간 노동의 폐해 축소시켜
장시간 노동 자체를 막을 획기적 대안 나와야"

#1

2019년 10월 조경산업기사 A(당시 36세)씨는 몸살이 심해 출근하지 못했다. 집에서 세 시간쯤 쉬었으나 목 안이 아프고 가슴이 답답한 증상은 나아지지가 않았다.

결국 동네 내과에서 진료를 봤고 인후통 진단을 받았다. 그는 모처럼 틈이 난 김에 한 달 전에 다쳤던 발목을 검사하러 근처 정형외과도 찾았다. 발목은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해 한 달 내내 부어 있었다.

A씨는 그러나 엎드린 상태로 검사를 받던 와중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곧장 근처 응급실로 이송됐으나 그날 사망했다. 사인은 '상세불명의 심장정지'였다.

A씨는 키 180㎝ 정도에 80㎏이 넘는 건장한 체격의 남성으로 특별한 병력은 없었다. 다만, 재개발 현장의 준공 일정이 다가오면서 사망 3개월 전부터 업무량이 주 52시간 이상 폭증했었다. 사망 직전 1주일 동안은 휴일 없이 주 67시간을 일했다.


#2

택시기사 B(60)씨는 3년 7개월 동안 오후 5시부터 다음 날 새벽 5시까지 일했다. 2019년 12월의 그날도 새벽 2시 30분쯤 승객을 목적지에 내려준 뒤 근처에 정차해 잠시 쉬고 있었다.

20분 뒤 그는 길바닥에 쓰러진 채 발견됐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119 구급대원에 의해 근처 대학병원 응급실로 옮겨졌으나 20분여 만에 사망했다. 부검의는 그의 사인을 '허혈성 심장질환(혈류장애로 심장에 적절한 혈액공급이 되지 않는 질환)'으로 기재했다.

B씨는 사망 당일도 여느 때처럼 손님을 태우고 운전하기를 반복했다. 문제는 근무 시간이었다. 그는 사망 직전 3개월 동안 주당 80시간 근무했다. 직전 일주일 동안은 총 95시간을 근무한 것으로 밝혀졌다.

장시간 노동은 비단 A, B씨의 삶만을 좀먹는 것이 아니다. 하루 10시간, 주 6일 근무하다 3월 숨진 로젠택배 경북 김천터미널 소속 김종규(51)씨까지 올해는 5명, 지난해엔 16명의 택배노동자가 장시간 노동으로 목숨을 잃었다는 주장이 제기되며, 장시간 노동은 사회 현안으로 떠오른 상황이다.

그런데 최근 세계보건기구(WHO)와 국제노동기구(ILO)도 한국의 과로사 문제가 상대적으로 심각하다는 공동 연구결과를 내놨다.

30일 용혜인 기본소득당 의원실이 WHO와 ILO가 17일 발표한 공동연구보고서를 분석한 결과, 2016년 한 해 2,610명의 노동자가 주 55시간 이상의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다 뇌·심혈관계 질환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산된다.

앞서 WHO와 ILO는 2000~2016년 194개국의 장시간 노동으로 인한 뇌·심혈관계 질환 사망자 실태를 분석한 결과를 17일 발표했다. 그 결과 조사 대상 중 가장 최근인 2016년 한 해 장시간 노동과 연관돼 뇌졸증이나 심장병으로 사망한 노동자는 74만5,000여명이었다.

WHO·ILO는 같은 해 한국에서 10만 명당 5.9명이 장시간 노동에 의해 사망했다고 밝혔는데, 용 의원실이 그 결과를 우리 통계청 자료에 대입하자 사망자가 2,610명으로 계산됐다. 그중 뇌혈관질환 사망자는 1,733명이고, 허혈성 심장질환 사망자는 877명이다.

같은 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과 비교하자, 한국의 장시간 노동에 따른 뇌·심혈관계 질환 사망자수는 OECD 37개국 중 10위였다. 뇌혈관질환 사망자는 OECD 7위였고, 심장질환 사망자 수는 23위였다.

용 의원실 관계자는 "2016년 사망자 수는 2000년에 비해 47.3% 감소했다. 하지만 다른 OECD 국가들 역시 같은 기간 동안 사망률을 40.2% 떨어뜨렸다"며 심각성 자체가 사라졌다고 볼 수는 없다고 말했다.

WHO·ILO가 발표한 수치가 2016년 당시 정부가 업무상 질병으로 인정한 뇌·심혈관계 질환 사망자(300명)에 비해 8.7배 더 많다는 것도 눈에 띄는 대목이다. 그에 대해 용 의원실은 "장시간 노동을 정의하는 관점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라며 "우리 정부는 장시간 노동을 판단할 때 WHO·ILO보다 까다로운 기준을 적용해 왔다"고 설명했다.

WHO와 ILO는 장시간 노동을 주 55시간 이상으로 정의했다. 반면 한국 정부는 2016년 뇌·심혈관계 질환의 업무상 질병 인정 여부를 판단할 때 발병 전 4주 동안 주 64시간을 초과 근무하거나, 발병 전 12주 동안 주 60시간을 초과 근무하는 경우 업무와 질환 사이의 관련성이 강한 것으로 평가했다. 2016년은 주 52시간제 시행 이전이기도 했다.

또한 WHO와 ILO는 과거의 극심한 노동이 현재의 뇌·심혈관계 질환으로 이어질 수 있다며 '장시간 노동으로 인한 뇌·심혈관계 질환이 10년 안팎의 잠복기를 거쳐 노년기에 나타나는 경우'도 통계에 포함시켰다.

보고서는 그 근거로 '장시간 노동에 노출된 지 10년이 지나서야 건강 이상 신호가 증가하기 시작했다'는 프랑스의 코호트 연구(추적조사) 등을 제시했다.

그밖에 장시간 노동에 노출되는 인구 비율도 8.1~9.2%(240만~272만 명)로 OECD 국가 중에선 콜롬비아, 터키, 멕시코에 이어 한국이 4위를 차지했다. 장시간 노동으로 건강하게 살지 못하는 기간(DALYs)은 OECD 평균(10만 명당 143.6년)에 비해 36%포인트 높은 10만 명당 195.2년이었다.

용 의원은 "이번 분석은 점차 나아지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 현행 산재 인정 기준으로도 장시간 노동의 폐해를 축소해서 보여줄 수 있음을 시사한다"고 의의를 밝혔다.

그는 "장시간 노동 문제를 해결할 근본 대책은 장시간 노동 자체를 방지하는 것"이라며 "누더기가 된 현행 주 52시간제보다 획기적인 노동단축 목표가 나와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또 "현행법으로 노동시간을 규율할 수 없는 택배·경비·택시·화물운송·플랫폼노동자에 대해서는 따로 법을 정비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윤주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