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6일’은 이제 지구촌 환경운동 진영에 ‘역사적인 날’로 기록될 것 같다. 글로벌 거대 석유기업들이 탄소배출 감축이라는 시대적 요구를 외면하다 줄줄이 된서리를 맞았다. 세계 최대 석유기업 엑손모빌은 환경주의 주주에게 이사회 자리를 내줬고, 세계 2위 쉘은 탄소감축량 목표치를 높이라는 법원 판결을 받아 들었다. 5위 셰브론에서도 주주들이 배출량 감축을 요구하고 나섰다. 이 모든 일이 하루에 일어났다. 에너지사업 모델을 친(親)환경으로 바꾸지 않으면 더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강력한 경고다. 환경운동가들은 “지구의 승리”라며 기뻐했다.
미 언론에 따르면 이날 엑손모빌 정기 주주총회에선 소형 행동주의 펀드 ‘엔진넘버원’이 이사회 진출에 성공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엔진넘버원이 추천한 신재생 에너지 전문가 4명 중 2명이 신규 이사로 선임됐다. 아직 2명이 확정되지 않았는데 한 자리를 더 확보할 가능성도 있다. 엑손모빌 이사회는 대런 우즈 최고경영자(CEO)를 포함해 총 12명으로, 나머지 8석에는 현직 이사들이 재선임됐다.
엔진넘버원은 엑손모빌 견제를 위해 지난해 12월 출범한 헤지펀드다. 이 펀드가 지닌 엑손모빌 지분은 전체 0.02%에 불과하지만, 2대 주주인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과 미 3대 연기금의 지지를 얻어 골리앗을 쓰러뜨렸다. 엑손모빌은 친환경 전환을 서두르는 다른 업체들과 달리 오히려 석유ㆍ가스 성장세를 옹호해 거센 비판을 받아 왔다. 미국 일간 월스트리트저널은 “소액주주에 의한 엑손모빌의 패배는 역사적 사건”이라며 “글로벌 석유업계는 화석연료 중심 전략을 수정해야 하는 상황에 내몰렸다”고 짚었다.
같은 날 네덜란드에서도 환경운동가들의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법원이 쉘한테 기후변화 책임을 물어 2030년까지 탄소배출량을 2019년 대비 45% 줄이라고 판결한 것이다. 쉘이 제시한 20% 감축 목표보다 두 배 이상 상향됐다. 민간기업에 배출량 감축 명령이 내려진 건 처음이다. 사측은 “전기자동차 배터리, 수소 연료, 재생 에너지 등에 수십억 달러를 투자하고 있다”고 항변하며 즉각 항소하겠다고 밝혔다.
앞서 네덜란드 환경단체들은 쉘의 화석연료 개발이 생명과 인권을 위협한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지난해 쉘의 탄소배출량은 13억8,000만톤으로 전 세계 에너지 관련 배출량의 4.5%를 차지했다. 환경단체 ‘지구의 친구들’ 로저 콕스 변호사는 “우리는 이제 전 세계에서 석유기업들을 상대로 법적 조치를 취하기 위한 출발선에 서게 됐다”고 평했다. 이번 판결이 전범이 돼 향후 비슷한 소송이 잇따를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톰 웨처 영국 옥스퍼드대 교수는 “모든 에너지 및 탄소배출 기업들은 앞으로 탈(脫)탄소 계획을 가속화해야만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석유기업들의 잇단 패배는 기후 문제가 환경운동 진영과 정치권만의 의제가 아니라, 경제 분야에서도 주류적 사고가 됐다는 방증이다. 특히 ‘ESG(환경ㆍ사회ㆍ지배구조)’를 고려한 투자자들의 사회적 책임투자가 기업들의 변화를 추동하고 있다. 이날 셰브론에서도 주주들이 앞장서 탄소배출량 감축 결의안을 채택했다. 구속력은 없으나 경영진에겐 적잖은 압박이 될 상징적 조치다. 업체 측도 “신중하게 고려하겠다”고 화답했다. 최근 영국 석유회사 BP 역시 주주들과 기후변화 목표치를 협의하기로 약속했다. 투자자에 기후행동을 촉구하는 비영리조직 세레스의 앤드루 로건 책임자는 “석유업계가 이 분명한 신호에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곧 다가오는 전환기에 어떤 기업이 번성하고 몰락할지 결정될 것”이라고 진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