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은 기록을 남길 때 실수하지 않는다. 인간이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뿐이다. 문제는 거기에서 시작된다.”(‘굶주림의 기후’에서) 나무는 인류와 자연의 역사를 가장 오랜 시간 정직하고 성실하게 기록해온 ‘지구의 사관’(史官)이다. 나무는 인류가 출현하기 전, 생명이 아주 단순하던 지질시대부터 존재했다. 그 태고의 시간들을 품고 기억해주는 건 나이테다. ‘나무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나이테가 들려주는 문명 너머의 연대기이자 대서사시다.
책을 읽으며 나이테를 연구하는 학문이 따로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1930년대 생겨난 ‘연륜연대학(Dendrochronology)’은 그리스어로 나무라는 뜻의 ‘Dendros’, 시간이란 뜻의 ‘Chronos’에서 유래한 말로 나이테를 이용해 과거의 기후를 연구하고 생태계와 인간에 미치는 영향을 밝힌다. 연륜연대학은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과학’이다. 정체 모를 나노 입자도, 닿을 수 없을 만큼 멀리 떨어진 은하도 없지만, 손으로 나무를 쓰다듬고 맨눈으로 나이테를 바라보며 1만 년의 시간을 유영하는 일은 그 어떤 과학보다 신비롭다.
연륜연대학의 근거지인 미국 애리조나대 나이테 연구소 교수인 발레리 트루에(47)는 아프리카의 외딴 마을, 아메리카의 사막, 유럽의 오래된 숲, 몽골의 용암지대 등 세계 곳곳을 누비며 오래된 나무에 새겨진 역사의 비밀을 찾아 나선다.
나이테 연구가 세간의 주목을 받은 대표적 사건은 현존하는 악기 중 가장 비싼 것으로 알려진 바이올린 ‘메시아’ 진품 논란이었다. 바이올린의 세계적인 장인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가 1716년 만든 가장 손꼽히는 명품으로 가격이 2,000만 달러(약 224억 원) 이상인 것으로 추정되는 이 악기를 두고 위작 가능성이 제기됐다. 진짜와 가짜를 주장하는 양측이 근거를 든 건 나이테였다. 목재의 나이테 폭을 측정하면 바이올린 제작 시기를 추정할 수 있어서다.
문제는 서로 다른 연도의 나이테를 가장 최근 것이라 주장하면서 논란은 증폭됐다. 20년 넘게 이어진 진실공방은 2016년 영국의 연륜연대학자 피터 랫클리프가 이탈리아 현악기를 대상으로 제작한 표준 데이터베이스 덕분에 마침표를 찍었다. 메시아의 나이테 패턴이 1724년 스트라디바리가 만든 또 다른 바이올린인 ‘엑스-빌헬미’와 정확히 일치하면서 메시아는 진품으로 판가름 났다.
저자는 나이테에 켜켜이 새겨진 넓고 좁은 간격과 패턴을 ‘모스부호’에 비유한다. 넓은 나이테는 나무에게 성장과 행복의 표식이다. 식량과 물이 풍부하고 어떤 공격도 받지 않을 때 나타난다. 반면 가뭄이나 한파, 허리케인 등 ‘나쁜’ 주변 환경으로 생장에 투자할 에너지가 많지 않을 때 나이테는 좁아진다. 스트레스가 심할 경우엔 나이테 생성 과정을 건너뛰어 버리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과거의 기후를 따라 새겨진 나이테 탐험은 과학, 역사, 지리, 건축, 미술 등 생각지도 못했던 분야의 이야기로 독자를 인도한다. 저자는 로마와 몽골제국의 흥망성쇠도 나이테를 통해 가늠한다. 화창한 날씨와 함께 꽃길만 걷던 로마제국이 몰락하기 시작한 때는 ‘추운 여름’과 가뭄이 닥치면서였다. 척박한 땅에서 식량 생산량은 곤두박질쳤고, 말라리아 역병까지 겹치면서 제국은 무너져 내렸다는 주장이다. 촘촘하게 들어선 나이테는 로마 몰락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었다.
칭기즈칸의 전성기 역시 나이테는 알려준다. 몽골제국의 정복 활동이 한창이던 1211~1215년 15개의 넓은 나이테가 연속적으로 나타났는데, 이건 당시 강수량이 평균 이상인 다우기가 지속됐다는 걸 말한다. 습하고 온화한 기후에선 초원의 풀이 무성하게 자라는 법. 저자는 몽골의 전쟁기계 역할을 했던 군마를 먹일 사료가 충분히 제공됐고 그 덕에 많은 기병이 활동하며 몽골의 부흥기를 이끌었다고 분석한다.
나이테 연구는 현대 기후변화 연구에도 도움을 주고 있다. 1850년경을 기점으로 지구가 점점 뜨거워지고 있다는 걸 밝혀내며 기후변화의 심각성을 고발한 ‘하키 스틱 그래프’의 경우도 1,000년 동안의 나이테 데이터를 이용해 지구의 기온변화를 살핀 덕분에 성공할 수 있었다.
세상의 모든 나무에게는 각자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우리는 정확히 잘 세어보면서 그 말을 들어줘야 할 의무가 있다. 느슨하거나 또는 조밀하게 드러난 나이테의 이야기엔 우리가 되새겨야 하는 과거의 교훈이, 그리고 앞으로 지켜나가야 할 미래의 다짐이 담겨 있기에. 나무는 정말 모든 걸 다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