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인권’은 인권 수호자를 자처하는 유럽에서마저 ‘후순위’다. 최근 유럽 각국에서 ‘페미사이드(Femicideㆍ여성혐오 살해)’ 사건이 잇따르면서 강력한 처벌과 대책 마련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성(性)평등은커녕 생존 자체를 위협받게 된 여성들은 억눌렸던 분노를 터뜨리며 단체행동에 나섰다.
24일(현지시간) 영국 일간 가디언에 따르면 스페인에선 최근 일주일 동안 여성 5명이 남편이나 연인에게 살해당했다. 희생자 중에는 임산부도 있었다. 스페인 사회는 충격과 분노로 들끓었다. 페드로 산체스 총리는 “스페인은 여성 혐오라는 재앙을 겪고 있다”며 대책 마련을 약속했다. 스페인 정부는 2003년부터 페미사이드 피해자를 집계하고 있는데 18년 간 무려 1,092명이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목숨을 잃었다. 한해 평균 60명이 넘는다. 올해 들어서도 벌써 14명이 숨졌다.
이달 초 프랑스에서도 30대 여성이 남편에게 끔찍하게 살해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상습적인 가정폭력으로 접근금지명령을 받은 남편이 아내를 총으로 쏜 뒤 몸에 불까지 질렀다. 경찰에 체포된 남편은 “아내를 단지 괴롭힐 생각이었다”고 주장해 더 큰 분노를 불렀다. 희생자를 추모하는 집회엔 정부 관계자들도 참석해 애도를 표했다. 프랑스 여성단체에 따르면 매년 프랑스에서 여성 20만명이 가정폭력을 겪지만 경찰에 신고되는 사건은 5분의 1 정도에 불과하다.
잠재적 혐오 범죄 대상이 된 여성들은 결국 거리로 나섰다. 프랑스에선 최근 2년간 페미사이드 범죄에 저항하는 ‘게릴라 포스터 시위’가 파리를 비롯해 리옹, 보르도 등 전역에서 펼쳐지고 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모인 여성들이 “페미사이드를 멈추라”는 문구를 담은 포스터를 밤에 몰래 붙이고 흩어지는 방식이다. 시위를 조직한 페미니스트 활동가 카밀 렉트레이는 “현재 프랑스 200여개 도시와 마을에서 활동가들이 그룹을 이뤄 반(反)페미사이드 운동을 하고 있고, 영국 런던 등으로 시위가 확산하고 있다”고 말했다.
영국에선 올 3월 30대 여성이 귀갓길에 살해된 ‘사라 에버라드 사건’ 이후로 페미사이드 범죄의 심각성에 대한 논의가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 24일엔 1975년부터 1980년까지 여성 13명을 살해한 연쇄살인마 요크셔 리퍼에게서 살아남은 피해자가 어렵사리 목소리를 냈다. 1980년 요크셔 리퍼에게 공격을 받았으나 간신히 목숨을 구한 모 리아는 BBC방송에 “영국은 아직까지 여성 혐오가 팽배하다”며 “특히 경찰이 페미사이드 피해자를 배척하고 있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전문가들은 “유럽의 평등의식이 높지만 그동안 여성혐오 범죄엔 이런 인식이 적용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성폭력 피해자 지원단체 ‘누스투츠’를 설립한 캐롤라인 드 하스는 “그동안 페미사이드는 아예 관심 대상조차 되지 못했다”며 “사회와 정치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고 일갈했다. 가디언은 “흔히 평등이 보호되는 나라로 칭송받는 핀란드마저도 여성 살해율이 높다”고 짚었다. 유럽연합(EU)은 역내 페미사이드 사건을 조사해 2023년에 결과를 발표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