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의 무상함을 알려준 문인석

입력
2021.05.24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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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노원구와 도봉구의 경계에 걸쳐 있는 초안산에는 조선시대 사대부와 환관, 그리고 상궁을 비롯한 궁녀들의 묘가 1,000여 기나 있다. 지금은 산책로가 조성돼 평일에도 사람들이 많이 찾지만, 비가 오거나 날씨가 궂은 날에는 산 전체에 스산한 기운이 가득하다.

내가 찾은 지난 주말에도 아침부터 부슬비가 내려 무덤가 특유의 오싹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마음을 다잡고 조용히 우중 산책을 즐기던 중 눈앞에 커다란 문인상이 나타나 깜짝 놀랐다. 그것의 ‘출몰’ 때문에 울창한 숲에 가려져 잠시 잊고 있었던 이곳이 분묘군임을 깨닫게 되었다. 우두커니 서서 비를 맞고 있는 문인석을 보니 갑자기 '순장조(殉葬組)'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왕이나 귀족들이 죽으면 산 사람을 함께 묻었던 ‘순장’에서 유래된 단어인데, 언제부터인가 대통령 임기 마지막까지 운명을 같이하는 참모들을 가리킨다.

한국의 대통령들은 퇴임 1년 정도를 앞두고 예외 없이 ‘레임덕’이라는 힘든 시기를 맞았다. 대통령들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자신의 측근들을 중요 포스트에 앉혀 끝까지 함께하기를 원했다. 마치 비바람 속에서 묵묵히 자신의 주군을 지키고 있는 문인석처럼 말이다. 그러나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했던가. 권세나 영화도 오랜 세월 풍파를 견디고 서 있는 문인상의 얼굴처럼 무뎌지기 마련이다. 권력의 무상함이 닳고 닳은 문인석에서 빗줄기처럼 흘러내렸다.





왕태석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