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역 살인사건 5주기... "우리 사회는 여성에게 안전해졌나"

입력
2021.05.17 2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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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여성회 주최로 강남역 9번 출구서 추모 집회
취약한 여성안전 실태·정치권 젠더갈등 논쟁 질타

"누군가에겐 숨막히는 퇴근길, 누군가에겐 놀거리 가득한 젊음의 장소인 강남역이 우리에겐 추모의 공간이 된 지 5년이 지났습니다."

2016년 5월 17일 새벽, 서울 강남역 인근 노래방 건물의 남녀 공용 화장실에서 30대 남성 김모씨가 처음 보는 20대 여성을 흉기로 수차례 찔러 살해했다. 당시 화장실에 숨어 있던 김씨는 피해 여성보다 먼저 들어왔던 남성 6명은 그대로 내보낸 뒤 범행했고, 경찰 조사에서 "여자들이 나를 무시해서 죽였다"고 진술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우리 사회에선 여성을 향한 왜곡된 증오심에서 비롯한 '여성 혐오' 범죄에 대한 인식이 강화됐다.

사건이 발생한 지 꼭 5년이 지난 17일 오후, 강남역 9번 출구 앞에선 '강남역 살인사건 5주기, 우리의 기억과 투쟁은 멈추지 않는다'라는 주제로 희생자 추모 집회가 열렸다. 서울여성회가 주최한 이번 행사에 어두운 옷을 입고 모인 참가자들은 여전히 만연한 여성 혐오 범죄와 취약한 여성 안전 실태를 지적했다.

가장 먼저 연대 발언에 나선 20대 여성 문진주씨는 "여성이 여성이기 때문에 죽은 일을 유별난 범죄자의 '묻지마 살인' 사건으로 취급하는 사회에 환멸을 느낀다"며 "이 사건은 우리 사회 여성이 남성과 동일한 안전을 누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계기였다"고 말했다. 이어서 발언대에 오른 중년 여성은 "여성에게 안전하지 않은 사회에서 초등학생 딸이 겪을 폭력과 두려움을 생각하면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이 자리에 나왔다"고 밝혔다.

집회 참가자들은 최근 정치권에서 불거지는 '젠더 갈등' 논쟁에도 일침을 가했다. 20대 여성 강나연씨는 "성폭력 사건으로 선거에 패배한 여당에선 '과도한 여성주의 정책 때문에 졌다'는 말이 나오고, 야당은 눈앞의 표를 얻기 위해 혐오와 폭력에 맞장구를 쳐준다"며 "지지율을 위해 여성과 소수자를 때리는 정치를 그만두라"고 말했다. 강씨는 "'남녀갈등'이란 단어로 구조적 차별을 지우지 말고, 정치권이 더 근본적인 해결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날 집회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상황을 고려해 참석 인원을 9명으로 제한하되 같은 내용으로 두 차례 진행됐다. 참석자는 온라인으로 선착순 신청을 받아 선정했다. 가던 길을 멈추고 집회를 지켜보는 시민도 제법 있었다. 50대 여성 B씨는 "나 또한 딸에게만 밤길을 조심하고 옷차림을 단정히 하라고 당부했던 경험들이 떠오른다"며 "우리 사회가 여성에게 더 안전해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연대 발언이 끝난 후 집회에 참가한 시민들은 각자의 바람과 추모의 메시지를 적어 강남역 출구 계단 외벽과 주최 측이 준비한 게시판에 붙였다. 메모지에는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지금 우리는 어떤 강남역에 서 있는가' 등의 문구가 적혔다. 주최 측은 13일부터 온라인 추모 페이지(http://bit.ly/210517강남역5년)를 운영 중이다.


이정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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