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어느 결혼식장에서 단풍나무 화분이 통로의 돌 기둥 사이에 놓여 있었다. 축복의 남녀는 나무 사이를 통과해 미래로 걸어갔다. 나무는 꼭 인조 나무 같았다. 나는 식이 끝나면 쓰레기장에 가거나 재활용될 거라고 투덜거렸다. 그 나무들이 어느 하객의 마당에서 자란다는 얘기는 나중에 들었다. 그는 큰 화분에서 자라던 나무들이 마당에 곧바로 이식되도록 뿌리 채 비닐에 싸서 구덩이에 급히 옮겨 심었다고 했다. 그는 장기 이식 환자 돌보듯 세심하게 나무를 보살폈다. 처음 2년은 매일 물을 줘야 하는데 그렇다고 너무 흠뻑 젖을 정도로 주면 안 된다고, 조심조심 대하면 나무들은 잘 자란다고 했다.
속초에 사는 친구가 마당에 처음 목련을 심을 땐 아주 작은 가지 다발이었는데, 3년간 여름마다 호스로 물을 주며 돌보았더니 아주 아주 느리게 키가 크더니 어느 여름, 새로 난 가지를 따라 꽃이 봉오리를 맺었다. 그는 10년이 지나서야 부모의 뿌듯한 심정으로 나무를 바라보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 얘기를 듣는데 목련에 꽃이 필 때를 기다리는 것만큼 지루한 일이 세상에 또 있을까 싶었다. 나에겐 친구의 길고 느린 기다림이 또 하나의 마조히즘 같았다. 그러나 내가 남산 자락에 집을 지은 것 역시 흙과 새와 나무 사이에서 사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때 나는 조금도 못 기다리는 조급증으로 나무를 심으려고 했다.
헨델의 오페라에 나오는, 폭풍도 해하지 못할 플라타너스를 심을까? 시에서 한 줄씩 뽑아내듯 과일을 따게 해줄 대추나무는 어떨까? 너도밤나무나 떡갈나무는? 대파를 심고, 완두콩에 싹이 나고, 야채를 수확하는 그림도 그려보았다. 담장 아래 크림색 수선화 모종을 심고 비옥한 표토로 메울까? 무엇이 앞으로 가고 뒤로 갈지 각각의 위치를 고민하며 며칠을 보내는 것만큼 전원적인 고민이 있을까? 식물이 꽃을 피우면 그걸 본 친구 얼굴이 눈물로 빛이 나겠지? 그렇지만 마당 한 구석에 더미를 이룬 잎사귀며 죽은 꽃잎들은 어떻게 치우지?
녹색 카펫처럼 풍성하고 그리니치 자오선처럼 똑바르게 잔디를 심을까? 그러나 잡초를 뽑고, 배수를 체크하고, 울퉁불퉁한 면을 평평하게 하고, 뗏장을 파고 들어가 죽은 잔디를 골라내고, 제초제를 치고, 가을엔 생육을 촉진하도록 거름을 줘야 하겠지? 연못이 없으니 주기적으로 물을 공급하는 중앙통제 시스템을 빌려야 하나? 비가 안 오면 지하에서 물을 끌어올 수 있을까? 상수원이나 서울시에서 보란 듯이 단수를 하면 어쩌지? 그러기 전에 자체 시추공을 미리 갖춰야 할까? 시들지 않는 클로버와 얼마든지 무성해지는 엉겅퀴는 어떡하지? 로마의 잔디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어쨌든 잔디는 계속 자라날 것이다. 결국 나는 잔디를 포기하지 않는 정원사의 판타지를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커피나 마시며 몇몇 항목을 살피다 보니 질경이가 낄낄대며 웃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나는 집을 다 짓고 나서도 마당에 풀 한 포기 심지 않았다. 게으름이 게으름 위에 겹겹이 싸여 있었다. 아쉽진 않았다. 공원의 나무들이 소년소녀처럼 창문으로 손을 뻗고 있었으니까. 가끔 하품을 하며 창문을 열면 나무껍질이 이에 끼었다.
처음 듣는 짐승의 울음소리에 잠에서 깬 날, 공원의 수수께끼에 대해 말을 꺼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알고 보니 공원 관리소에서 전기톱으로 나무를 자르는 소리였다. 우리 집엔 벽난로가 없는데 베어진 가지는 여름 내내 썩어 작은 뱀들의 아지트가 될까?
지난밤 공원은 어둡고 깊었다. 아직도 추워서 담요를 덮고 찻물을 끓였다. 오늘 발코니에는 높은 바람이 불고 있었다. 구름 틈새로 바람의 협곡이 보였다. 나뭇가지 사이로 하늘이 배경이 아니라 전경으로 보이도록 눈을 가늘게 떴다. 공기가 아삭거렸다. 울타리 밑에 선 체리나무는 잎이 나기 전에 꽃을 피웠다. 프레임 사이로 쳐들어온 나뭇가지에 거미줄이 걸려있었다. 허공에 그은 금은 비바람에도 끄떡 없어 보였다. 나는 갑작스러운 고요에 황홀해졌다. 아무 이웃도 만나지 않고 나무만 보며 시간을 보내는 핀란드 사람이 된 기분. 그러나 진짜 핀란드인이라면 근면한 정신으로 아침부터 나무들을 솎고, 물고기를 잡고, 베리를 찾고, 망치로 퉁탕거리며 못을 박고, 순록 사냥을 떠났을 것이다. 어쩌면 오두막집에 사는 것 같았다. 높은 데서 나무를 만지는 것만큼 고매한 사치며 고독한 만족이 있을까? 결국 삶의 진수란 타인과 교류하지 않는 것인지도 몰랐다.
오후에 공원으로 나갔다. 꽃들에게 얼굴을 가까이 대고 그들이 자라는 형태를 보고 싶었다. 나는 벚나무 사이로 휘어진 길을 따라 걸어 내려갔다. 꽃들은 흩날리는 눈송이처럼 냇물가에 피어 있었다. 으르렁거리는 작은 폭포, 연못의 표면, 흙의 반짝거림. 나는 깔때기 모양의 푸른 꽃들이 즐거운 추억을 가지고 온 것처럼 “안녕!” 하고 인사했다. 둔덕 옆에 있는 작은 집을 향해 걸어 올라갈 때 얼룩이 있는 진줏빛 꽃잎이 얼굴로 날아들었다. 공원 관리소일까? 1960년대 일본 소설에 나오는 산림청 사무소처럼 목가적인 흰색 단층 건물은 전부터 궁금했었다.
키가 작고 구부러진 나무들이 그곳을 에워싸고 있었다. 이끼가 난 자리에는 토끼 귀처럼 호리호리한 식물이 자라고 있었다. 풀 냄새가 축축하게 풍겼다. 집 뒤쪽으로 낮은 문이 나 있었다. 녹슨 자물쇠로 잠겨 있어서 그 공간의 용도를 알 수 없었다. 낮은 문은 더욱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나는 호기심 많은 정원사처럼 그 문으로 다가갔다.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앨리스는 유리 테이블과 황금 열쇠, ‘날 마셔요’’라고 적힌 라벨이 붙은 병을 살펴보며 자기가 발견한 낮은 문에 대해 이야기한다.
허버트 조지 웰스의 단편 ‘담장에 난 문’은 월리스가 다섯 살 때 웨스트 켄싱턴 거리를 헤매다 어떻게 흰 벽에 난 녹색 문을 보았는지 옛 친구에게 들려주는 형식으로 전개된다. 문 안으로 들어간 월리스는 기묘한 정원으로 둘러싸였다는 것을 알았다. 원숭이와 길들여진 표범, 친절한 소녀는 엄마 없는 아이에겐 존재하지 않았던 상냥한 친구들이었다. 월리스는 그후로도 녹색 문과 계속 마주치는데 그 문은 이상하게 걸음을 멈출 수 없는 상황에서만 나타났다. 월리스는 그 문을 다시 보면 꼭 그 안으로 들어가겠다고 친구에게 말한다. 얼마 뒤 월리스가 죽었다는 기별이 들렸다. 벽에 난 문은 건물 지하 수직 통로와 이어져 있었고, 그 문을 통과한 월리스는 통로 바닥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프랜시스 호지슨 버넷의 ‘비밀의 화원’에서 메리라는 고아는 붉은가슴울새의 지저귐에 이끌려 알 수 없는 화원으로 간다. 그곳은 ‘담장에 난 문’에 나오는 정원처럼 황홀한 치유의 공간이었다. 에블린 워의 ‘다시 찾은 브라이즈헤드’에도 찰스 라이더는 도시의 성벽만큼 오래된 낮은 문 앞에서 주저한다.
이런 이야기에는 아주 익숙한 고리가 있다. 마법에 걸린 정원으로 이어지는 벽에 난 문이라는 아이디어가 서로 뚜렷하기 때문에. 비밀의 문은 그렇게 이상적인 유년기나 신나는 평행 우주처럼 닿기 힘든 곳으로 이어지는 길을 은유한다. 필리파 피어스의 ‘한밤중 톰의 정원에서’에 나오는 뒷문과 '나니아 연대기'의 장롱처럼 비밀의 화원으로 통하는 다른 관문도 있지만 캐럴과 워의 낮은 문만큼 기묘한 매력이 있지는 않다.
늘어뜨려진 담쟁이덩굴로 덮인 채 칠이 벗겨지고 물집처럼 기포가 잡힌 벽. 그 사이로 난 문은 아주 낮아서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선 어른도 몸을 구부려야 한다. 그렇게 다시 아이로 돌아갈 수 있도록. 그러나 비밀의 화원은 어쩌면 과거의 향수에 갇힌 직무 유기의 공간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자갈이 깔린 길을 자박자박 밟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가지 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찢긴 중국 지도 같았다. 낮은 문과 연관된 관념은 늘 탄성을 뿜어낼 것이다. 그러나 나는 현실로 돌아와 차가운 철 대문을 열었다. 나무가 심어져 있지 않은 나의 작은 화원에는 마르지 않은 빨래가 걸려 있었다.
에세이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