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봄정책 구멍 숭숭… 가족에 짐 떠넘겨

입력
2021.05.17 04:30
5면
<1> 돌봄: 아이보다 하루만 더
정부, 15개 장애만 인정… 장애 등록부터 난관
돌보기 힘든 중증장애는 인력 지원 받기 힘들어
"현실 맞게 장애 기준 낮추고 돌봄 시간 늘려야"

편집자주

장애인이 우리 사회의 의젓한 일원으로 살아갈 수 있는 정책적 환경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현실에서 이들의 불안한 삶을 지탱하는 건 가족의 안간힘이다. 국내 장애인 규모가 등록된 인원만 해도 262만 명이니, 이들을 돌보는 가족은 못해도 1,000만 명을 헤아릴 터이다. 장애인 가족의 짐을 속히 덜어주는 것만큼 시급한 국가적 과업은 많지 않을 것이다.

장애인 돌봄을 위한 정부 정책의 핵심은 장애인 활동지원 제도다. 장애 정도, 취업 및 학업 여부, 가구 환경에 따른 지원 한도 내에서 활동보조, 방문목욕, 방문간호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2019년 기준 장애인 활동지원을 신청한 장애인은 8만6,000여 명, 이들을 도울 활동지원사는 8만4,000여 명으로 수요와 공급의 균형은 어느 정도 맞춰졌다. 그러나 장애인 가족 상당수는 장애를 인정받는 단계부터 한계에 부딪히거나 중증장애의 경우 활동지원사를 구하지 못하는 등 복지제도를 온전히 활용하지 못한다. 이런 경우 장애인을 돌보는 책임은 결국 가족이 떠안을 수밖에 없다.

장애 인정부터 장벽… 가족이 돌봄 떠안아

장애인 복지는 정부가 인정하는 '등록장애인'을 대상으로 하지만, 많은 장애인이 '등록' 단계부터 어려움을 겪는다. 현행 장애유형 판정 기준은 지체·시각·청각·언어·지적·뇌병변·정신·자폐성·신장·심장·호흡기·간·안면·장루요루·뇌전증 등 총 15개로 운영되고 있다. 그러나 장애의 범위와 정도가 다양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한정적 기준으로 모든 장애인을 복지망에 편입시키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실제 선진국과 우리나라의 장애출연율(전체 인구 대비 등록장애인 수)을 비교하면 2018년 기준 영국은 21.1%, 미국은 19.3%인 데 비해 한국은 2019년 기준 5.4%로 이에 크게 못 미친다. 그만큼 우리나라의 장애 인정 범위가 협소하다는 의미다. 예컨대 유럽연합(EU)은 '6개월간 건강상 문제로 활동에 제한이 있는 자'를 장애인으로 폭넓게 인정한다.

이렇다 보니 국내 장애인 중 장애가 명확한데도 '정부가 인정하는 장애'를 따로 입증하려 노력해야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근감소증이 장애유형 판정 기준에 포함되지 않아 판정 당국인 국민연금공단으로부터 3년째 장애 판정을 못 받고 있는 이기형(61)씨는 '뇌병변' 항목에라도 포함되기 위해 소뇌 검사를 추가로 받고 있다. 이씨를 돌보고 있는 김재영 사회복지사는 "생활 능력을 잃은 노인들이 장애인 등록을 신청했다가 '15개 기준'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거절당하는 일이 자주 있다"고 말했다.

장애인 복지서비스 수급이 대부분 장애 등록과 결부돼 있다 보니, 미등록 장애인은 결국 가족이 무료 활동지원사 노릇도 하고 필요한 비용도 벌어야 한다. 투렛 증후군(틱 장애)이 있는 아들을 돌본 지 10년이 넘었다는 임모(47)씨는 "최근까지 투렛 증후군이 장애로 인정받지 못해 내가 아이를 수발하면서 맞벌이로 생계까지 책임지느라 버거웠다"고 말했다. 투렛 증후군은 지난달 정신장애로 인정돼 임씨 가족은 이제야 복지서비스를 받을 수 있게 됐다.

중증장애는 돌봄인력 구인난까지

중증장애인은 돌봄이 없으면 곧바로 생존에 위협을 받기 때문에 돌봄 공백을 최소화해야 한다. 그런 만큼 정부 지원이 절실하지만, 현실적으로 중증장애인을 돌보는 책임은 가족에게 돌아오기 쉽다. 중증장애인 돌봄은 노동 강도가 높다 보니 활동지원사가 이를 기피하는 현상이 심하기 때문이다. 중증장애인 활동지원을 해도 올해 기준 시간당 1,500원의 가산수당이 지급되는 게 전부다. 현장에서는 "정부가 돌봄 노동 강도에 맞게 가산수당을 현실화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일부에서는 중증장애인 활동지원이 원활치 않은 만큼 가족에게 활동지원사 자격을 부여해 돌봄에 따른 경제적 부담이라도 덜어주자는 제안도 나온다. 그러나 보건복지부의 장애인 활동지원 지침은 배우자(사실혼 포함), 형제자매, 직계가족, 시어머니, 시누이, 사위, 며느리 등이 장애인에 대한 활동지원 서비스를 제공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섬・벽지 등 활동보조사를 구하기 힘든 지역에 한해 예외를 허용하지만 이마저도 급여의 50%만 제공된다. 가족이라는 이유로 무조건적 희생을 치르며 장애인을 돌봐야 하는 구조인 셈이다.

국가가 장애 폭넓게 책임져야

정부도 이런 고충을 감안해 장애 등록 장벽을 낮추는 추세다. 복지부는 지난달 장애인복지법 시행령 개정을 통해 시각장애와 정신장애의 인정 범위를 넓혔고, 시행규칙 및 심사규정 고시를 개정해 지체장애, 장루・요루장애 인정 기준도 완화했다. 또 국민연금공단 내 설치되는 ‘장애정도심사위원회’를 확대하고 기능을 강화해 예외적 장애도 심사할 수 있는 절차를 마련할 계획이다.

전문가들은 장애인과 장애인 가족의 부담을 줄일 수 있는 제도가 계속 마련돼야 한다고 제언한다. 이봉주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국내에서는 주로 의학적 차원에서 장애 판단 기준을 세우는데, 앞으로는 생활이 가능한지를 따지는 등 실질적 상황에 따라 기준을 확대해야 한다"며 "장애인에게 제공할 돌봄 시간도 현실에 맞게 늘려서 가족의 부담을 덜어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은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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