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유럽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백신을 싹쓸이하든, 인도가 감염병 통제 불능에 빠져 나라 전체가 화장장이 되든, 그로 인한 연쇄 피해의 종착지는 어김없이 아프리카다. 대륙 밖 코로나19 상황에 따라 아프리카의 백신 물량과 접종 계획이 휘청거린다. 12억 아프리카 인구 중 백신을 한 번 이상 맞은 비율은 고작 1% 남짓. 세계에 공급된 백신 중 2%만이 아프리카로 갔다. 미국(44%)과 유럽연합(EUㆍ22%)의 높은 접종률과 비교하면 더욱 더 참담한 현실이다.
8일(현지시간) 영국 경제주간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세계의 백신 공장’ 인도가 자국민 수요를 위해 백신 수출을 중단한 이후 아프리카 국가들은 통렬한 각성을 했다. 돌발 상황에서도 안정적으로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자체적으로 백신을 생산해야 할 필요성을 깨달은 것이다. 존 응켄가송 아프리카질병통제예방센터 소장은 “인도 상황이 아프리카 대륙에 경각심을 줬다”고 했다.
때마침 동기부여 요인도 생겼다. 인도와 남아프리카공화국 주도로 세계무역기구(WTO)가 백신 지식재산권 일시 면제 방안을 논의 중이고, 미국이 이를 적극 지지하고 나섰다. 만약 합의에 이르면 최대 수혜자는 아프리카가 될 가능성이 높다.
움직임도 빨라지고 있다. 남아공 제약사 아스펜 제약은 존슨앤드존슨의 얀센 백신을 위탁 생산하기로 했고, 알제리는 러시아 백신 스푸트니크V를 9월부터 만든다. 세네갈에 있는 파스퇴르연구소도 프랑스 정부, 유럽투자은행과 협력해 내년부터 연간 3억회분 생산에 들어간다. 이집트, 튀니지, 모로코 등도 황열병, 파상풍, 콜레라 같은 풍토병 백신을 만든 경험이 풍부해 백신 생산 기지로서 잠재력이 높은 것으로 평가받는다.
나아가 르완다는 최신 바이오기술인 ‘메신저 리보핵산(mRNAㆍ전령RNA)’ 방식 백신을 만들기 위해 화이자ㆍ모더나와 협상 중이다. 폴 카가메 르완다 대통령은 “우리가 해외에 백신을 의존하는 한, 항상 대기 줄의 맨 끝에 있게 될 것”이라며 “백신 공정 분배를 보장하는 유일한 방법은 백신이 필요한 곳에서 직접 생산하는 것”이라고 굳은 의지를 내비쳤다. 아프리카연합(AU)은 20년 안에 아프리카에 필요한 백신 40%를 자체 충당한다는 목표도 세웠다.
물론 걸림돌이 없진 않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아프리카 전체에 백신 제조시설은 이집트, 모로코, 튀니지, 남아공 등을 다 합쳐도 10곳이 채 안 된다. 그나마도 대부분 포장이나 라벨링을 하는 공장뿐이다. 그간 아프리카는 백신 99%, 전체 의약품 70%를 수입에 의존할 만큼 의약품 개발ㆍ투자에 미흡했다. 때문에 자본과 기술을 유치하고 생산 설비를 갖추려면 막대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스타브로스 니콜라우 아프리카제약산업협회 회장은 “오염이 완벽 통제되는 백신 생산 시설을 지으려면 상당한 자본과 전문 기술이 필요하다”며 “지속적인 수요와 유통망을 보장해야 투자가 이뤄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다국적 제약사들에게 아프리카는 ‘블루오션’이 될 수 있다.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이 종식돼 코로나19 백신이 필요 없어지면 다른 백신을 만들면 된다. 아프리카에서 한 해 수억개씩 소비되는 소아 백신이 대표적이다. 모더나도 아프리카에 백신 공장 설립을 타진 중이다. 이코노미스트는 “모더나가 코로나19 외에도 황열병, 뎅기열, 지카바이러스 백신을 만드는 데 관심이 있다”고 전했다. 올해 초 ‘아프리카대륙자유무역지대(AfCFTA)’가 공식 출범하면서 거대한 단일 시장이 만들어진 것도 제약사에는 호재다.
다만 아프리카의 백신 제조 능력을 키우고 시장을 확대하기 위해선 의약품 승인과 규제를 담당하는 아프리카의약품청(AMA) 설립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솔로몬 퀘이너 아프리카개발은행 부대표는 “아프리카 국가들이 백신 생산을 진지하고 고려하고 있다면 당장 AMA 설립에 나서야 한다”며 “이것은 아프리카가 더 많은 백신을 만들 준비가 돼 있다는 강력한 신호가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