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아동학대 관련 뉴스가 심심찮게 들려옵니다. 의사 표시를 제대로 하지 못하거나 사회적 활동을 할 수 없는 아이들이 학대 대상이 된다는 것만으로도 분노 게이지를 솟구치게 합니다. 가해자가 부모인 경우가 많으니 말세를 운운하며 분개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국내만의 일은 아닙니다. 지난해 6월 세계보건기구(WHO) 발표에 따르면 전 세계 2~4세 아동 4명 중 3명이 신체적ㆍ정신적 폭력에 지속적으로 시달리고 있다고 합니다. 가해자는 부모와 보호자라고 합니다. 아이들과 가장 가까이 지내는 사람이 가장 위험한, 아이러니한 상황입니다.
분노의 화살은 당연히 가해자에게 향해야 하지만, 폭력을 휘두른 부모 탓만 해야 할까요. 사회는 아무런 책임이 없는 걸까요. 가해자를 엄하게 단죄한다고 아동학대가 사라질까요. 최근 아동학대 뉴스를 접하다 영화 ‘가라 아이야 가라’(2007)가 떠올랐습니다. 할리우드 스타 벤 애플렉의 감독 데뷔작으로 추리 소설 작가 데니스 루헤인의 동명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한 영화입니다. 사회가 아동을 어떻게 보살펴야 할지 질문을 던지는 수작입니다(IPTV와 왓챠 등에서 볼 수 있습니다).
미국 보스턴 도체스터 지역에서 4세 아이 어맨다가 실종됩니다. 싱글 맘 헬렌(에이미 라이언)은 잠시 옆집에 들렸다 온 사이 아이가 사라졌다고 주장합니다. TV뉴스에 출연해 제발 아이를 돌려보내달라고 애원하기도 합니다. 경찰이 수사에 나서지만 실마리를 찾지 못합니다. 경찰은 헬렌의 행적에 의문을 품기도 합니다. 위층에 살고 있는 헬렌의 오빠 라이오넬과 올케 베아트리스는 헬렌을 탓합니다. 평소 아이를 방치하고 밖으로 돌던 헬렌의 일상을 잘 알고 있으니까요.
오빠 부부는 사립탐정 커플인 패트릭(케이시 애플렉)과 앤지(미셸 모너핸)에 사건을 의뢰합니다. 자포자기 상태인 헬렌과 무능력한 경찰만 믿다가는 불쌍한 어린 조카를 영영 찾지 못하리라는 생각에서입니다. 패트릭과 앤지는 탐문 끝에 헬렌이 아이 실종 당시 술집에서 술을 마셨고, 애인과 마약 운반책으로 일했다는 사실을 알아냅니다. 패트릭과 앤지는 경찰과 함께 헬렌을 추궁해 그녀가 마약조직 몰래 13만 달러를 빼돌린 사실을 알아냅니다. 어맨다의 실종이 마약조직과 연계돼 있음을 직감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마약조직의 수괴 ‘치즈’는 돈과 아이를 맞바꾸자고 제안합니다. 이후 영화는 반전을 거듭하며 예상 밖 결론에 이릅니다.
영화 속에서 아이는 종종 거래의 대상으로 표현됩니다. 어른들은 자신의 육체적 만족을 위하거나 금전적 이익을 위해서 아이들을 이용합니다.
생물학적 엄마일 뿐인 헬렌은 자신의 아이 어맨다를 방치하며 간접적으로 학대합니다. 헬렌은 어맨다가 끌어안고 사는 인형의 이름 애너벨을 미러벨로 알 정도로 아이에 무관심합니다. 어맨다를 잃어버렸을 때는 미친 듯이 찾고자 하지만, 이기심의 발로로밖에 볼 수 없습니다. 자신의 심적 안정을 되찾거나 사회적 비난을 면하기 위한 행동으로 보입니다.
어맨다를 걱정하는 듯한 외삼촌 라이오넬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금전을 위해 어맨다를 이용하는 장면이 영화 후반부에 등장합니다. 어맨다를 유괴한 일당 역시 아이를 위하는 척은 하지만 실은 자신들의 정신적 안정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어맨다의 경우는 약과에 불과합니다. 어맨다가 실종된 이후 유괴된 7세 소년 에버릿은 몹쓸 어른들의 노리개로 전락합니다. 영화의 원제 ‘Gone Baby Gone(사라진 아기 사라진)’은 의미심장합니다. 어맨다나 에버릿처럼 어른들의 방치나 학대 속에 위태로운 상황에 처한 아이들이 한둘이 아님을 암시합니다. 영화 속 형사 레이(에드 해리스)는 이런 말을 합니다. “아이들은 한쪽 뺨을 맞고 다른 쪽 뺨을 내놓지.” 아이들이 자신들에게 험한 행동을 한 사람들을 잘 용서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아이들이 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차갑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약육강식 사회에서 아이들은 언제나 먹잇감에 불과하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영화는 어른들의 무관심이나 이기심에서 비롯된 아동학대를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아동학대를 막기 위해 사회가 해야 할 조치는 과연 무엇인가 질문을 던지기도 합니다. 패트릭은 아동학대에 따른 참담한 결과를 보고 분노를 주체하지 못합니다. 위법적으로 가해자를 단죄합니다. 앤지는 수사 중 자신 때문에 한 아이가 죽었다는 죄책감 때문에 무력감에서 헤어나오질 못합니다. 영화는 패트릭과 앤지처럼 분노하고 단죄하고, 슬퍼한다고 해서 아동학대라는 문제가 해결될 수는 없음을 암시합니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건너 뛰고 싶으시면 ☞부터 읽으시면 됩니다.
영화는 아이에 무관심한 엄마 헬렌과, 아이를 유괴해 키우는 사람을 비교하기도 합니다. 아이는 아무리 자신을 방치한다고 해도 친엄마와 함께 살아야 맞는 것일까요, 아니면 불법을 저질렀다지만 조금이라도 선의를 지니고 아이에게 안락한 환경을 제공해 줄 사람들과 지내야 할까요. 영화는 명확히 답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어느 쪽이 옳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영화는 다루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시작 무렵부터 언급합니다. 보스턴 시내 성조기가 펄럭이고, 사람들이 오가는 모습을 담은 화면 위로 이런 내레이션이 흐릅니다. “육체에 갇힌 영혼들, 이 도시가 그들을 가두고 있다… 불우하게 태어난 사람은 평생 불행하게 산다.” 여러 사회 문제가 구조적인 원인에서 비롯됨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어떤 문제가 생기면 개인만 탓하거나 선한 개인에게 맡기지 말고 국가와 사회가 적극 나서야 한다고 주장하는 내레이션으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헬렌은 아이가 실종된 책임을 추궁 당하자 이렇게 항변합니다. “엄마가 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알아, 혼자서?” 변명 섞인 말이지만 허투루 들을 순 없습니다. 국가와 사회가 뒷짐 진 상황에서 헬렌에게만 육아에 대한 무한책임을 물을 수는 없습니다.
WHO는 아이와 가족에 대한 지속적인 보호가 학대 재발을 줄이고, 피해를 최소화 할 수 있다고 진단합니다. 국가와 사회의 적극적인 개입이 아동학대를 막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라는 주장입니다. 최근 인천 한 모텔에서 친아버지의 학대로 생후 3개월 된 아기가 중태에 빠져 충격을 줬습니다. 시사주간지 시사인 등 여러 매체를 통해 해당 가족의 불우한 사정이 학대와 연계돼 있는 것으로 전해져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습니다. 사회안전망이 좀 더 촘촘했으면 미리 막을 수 있는 학대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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