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신 여권 '쿠브'부터 깔고"… '보복 여행' 준비하는 사람들

입력
2021.05.09 09:00
백신 접종 본격화에 억눌렸던 여행 수요 폭발
백신 접종자 겨냥 해외여행 상품 출시 잇따라
미국인 3분의 2 "상반기 내 여행 계획"
온라인 여행사 익스피디아 CEO "보복 여행 지지"


아스트라제네카(AZ)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백신 부작용 논란 때문에 조금 불안한 마음도 있었지만 이번 여름 휴가는 꼭 외국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컸어요.

30대 중반 직장인 이영희(가명)씨는 얼마 전 '노쇼(no-show·예약 불이행) 코로나19 백신'을 맞았다. 예약 당일 백신 접종 대상자가 나타나지 않아 생기는 물량에 대한 예비 명단에 이름을 올려놓은 덕분이다.

AZ 백신 1차 접종을 마친 이씨는 7월 2차 백신 접종 2주 후 항체 형성 시기를 감안하면 8월부터 백신 접종자로서 귀국 후 자가격리 없이 해외여행을 할 수 있다. 50대 후반으로 아직 코로나19 백신 접종 대상자가 아닌 이씨의 어머니도 같은 방식으로 코로나19 백신 1차 접종을 마쳤다.

이씨는 "어머니와 함께 코로나19 음성 확인서가 있으면 도착 후 격리가 면제되는 하와이를 염두에 두고 항공권을 알아보는 중"이라고 말했다.

세계 각국이 코로나19 백신 접종에 박차를 가하면서 1년 넘게 억눌렸던 여행 수요가 폭발하고 있다. 코로나19 확산에 따른 이동 제한이 길어진 데 대한 반발심으로 적극적으로 여행 계획을 세우는 이른바 보복 여행(revenge travel)이 본격화하고 있다.

백신 접종률이 상대적으로 높은 미국과 영국이 대표적이다. 전례없이 급감했던 항공·숙박 예약률이 되살아나고 있다.

한국에서도 정부가 백신 접종률을 높이기 위해 백신 접종자의 자가격리 면제 방침을 밝히면서 해외여행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일부 여행사는 백신 접종자를 겨냥한 해외 패키지 상품을 선보였고, 여행 관련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노쇼 백신 접종 경험담과 여행 계획을 담은 글이 잇따라 올라오고 있다.


억눌린 여행 수요 분출에서 희망 찾는 여행업계

여행업은 코로나19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업종이다. 하지만 최근 여행업계는 실적 악화 속에도 보복 여행을 거론하며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다. 코로나19 피해 상황이 덜 심각한 곳에서 제약 없이 휴가를 즐기고 싶어서, 또는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친구·지인과의 만남 등 여러 이유로 여행 욕구를 분출하는 이들이 관광업을 되살릴 것으로 기대하고 있어서다.

블룸버그통신은 6일(현지시간) "나스닥 상장 여행기업 익스피디아의 1분기 예약률이 전년 대비 14% 떨어져 전망보다 나은 실적을 기록했다"고 전했다. 전년 동기 대비 70% 하락한 지난해 4분기 실적과 비교해 크게 좋아졌다. 이 때문에 익스피디아는 이날 전년 동기 대비 44% 하락한 1분기 매출 실적을 발표했지만 주가는 약 7% 올랐다.

이날 피터 컨 익스피디아 최고경영자(CEO)는 "주요 도시가 조용한 반면 해변과 야외 명소는 예약 실적이 크게 올랐다"며 "여행하기에 안전한 상황만 되면 여행 수요는 곧바로 되살아난다는 의미"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나는 보복 여행을 응원한다"고 덧붙였다.

최근 캐롤린 도욘 클럽메드 북미·카리브해 CEO도 보복 여행을 언급했다. 그는 미 인터넷매체 허핑턴포스트를 통해 "백신이 널리 보급되고 사람들이 점점 여행을 편안하게 여기면서 보복 여행에 나선 이들이 크게 늘었다"고 밝혔다.

이는 각종 여론조사 결과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여행전문 사이트 트립어드바이저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미국인의 67%가 여름(6~8월) 여행을 계획 중이다. 봄(3~5월)을 앞두고 진행한 같은 조사보다 17% 늘어난 수치다. 미국여행협회 조사에서도 이번 여름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는 미국인은 72%로, 지난해 이맘때 37%에서 크게 늘었다.

또 아메리칸항공은 3월 말 감독기관 보고서를 통해 항공편 예약률이 80%라고 밝혔다. 코로나19 확산 이전인 2019년 평균의 90% 수준까지 회복됐다는 설명이다.

보복 여행 추세는 숙박업계 실적에서도 드러난다. 숙박공유업체 브르보(VRBO)의 제프 허스트 CEO는 최근 CNN 방송과 인터뷰에서 "경이로운 실적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며 "코로나19 백신 접종자들이 어느 정도 자유를 느끼면서 항공·숙박업은 크게 되살아날 것"이라고 말했다.

코로나19 백신 1회 이상 접종률이 50%를 넘긴 영국에서도 여름 휴가 예약이 몰리고 있다. 영국 봉쇄 해제 계획에 따르면 17일부터 비필수 해외여행이 가능해진다.

일간 가디언에 따르면 7월 1일 이후 출발 상품을 판매 중인 여행사 토마스쿡의 여름 휴가 상품 예약률은 일주일 만에 50% 올랐다.

그런가 하면 전 세계적으로 백신을 접종한 외국인에 대해 입국 시 의무 격리 조치를 완화하는 국가가 늘면서 국내 여행업계도 해외여행 기지개를 켜고 있다.

참좋은여행이 지난달 30일 국내 여행업계에서 처음으로 코로나19 백신 접종자 대상 괌 패키지 여행 상품 판매에 나선 데 이어 모두투어·하나투어 등도 백신 접종자 전용 여행 상품을 선보였다.

각종 여행 관련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노쇼 백신' 관련 글과 함께 코로나19 백신 접종 이후 격리나 입국 제한을 풀어 주는 나라에 관한 정보가 꾸준히 업데이트되고 있다.

'격리 면제해 주는 곳, 최고 여행지'…달라진 코로나 시대 여행법

물론 기약 없던 해외여행 길이 열리기는 했지만 여행 양상은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게 현실이다.

당장 선택할 수 있는 여행지가 한정적이다.

국내 여행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백신 접종자의 올여름 유망 여행지로 격리가 면제되는 괌·하와이·몰디브 등이 거론되고 있다.

그리스도 백신을 접종했거나 코로나19 음성 확인서가 있는 한국인은 격리 의무가 면제되기 때문에 백신 접종자는 입출국 시 격리 조치 없이 여행할 수 있다.

유럽연합(EU)도 백신 접종자에 대해 비필수 여행자의 입국을 허용하기로 했다. 하지만 유럽 지역은 코로나19 확산 상황이 아직 심각하기 때문에 여행자들의 선호도가 크게 높지는 않다.

인파가 붐비는 도시보다는 야외 레저 활동을 즐길 수 있는 휴양지를 더 좋아하는 것도 보복 여행을 준비하는 이들의 특징이다. 일행 이외 사람과 대면할 일이 상대적으로 많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투어가 코로나19 백신 접종자를 대상으로 내놓은 여행 상품이 하와이·몰디브 등 휴양지 리조트 상품 위주인 것도 그래서다. 하나투어 관계자는 "장기적 여행 수요 회복세를 보고 선제적으로 해외여행 상품을 내놓기는 했지만 아직까지는 조심스러운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챙겨야 할 여행 필수품도 달라졌다. 여권 외에 백신 접종 증명서를 챙겨야 한다. 질병관리청은 지난달부터 디지털 백신 접종 증명서인 스마트폰 응용소프트웨어(앱) 형식의 백신 여권 '쿠브(COOV)'를 발급하기 시작했다.

여행 동선을 짜는 것도 코로나19 발병 이전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여행지의 코로나19 확산 상황에 따라 관광 시설은 물론 외식업계 등의 영업 규약이 수시로 달라질 수 있어서다.

어느 국가든 국립공원 등 정부 관리 시설은 코로나19 확산 방지 차원에서 예약자에 한해 개방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현지 정보를 꾸준히 업데이트해야 한다.

"섣부른 관광 재개로 코로나 재확산할라" 우려도

다만 이처럼 해외여행에 눈을 돌리는 이들이 늘면서 코로나19 확산 상황을 우려하는 전문가들의 경고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뉴욕타임스(NYT)는 5일 "국제 여행 귀환에 대한 장밋빛 소식이 들려오지만 낙관론은 시기상조"라며 "관광지의 백신 접종 지연·백신 접종 검증 시스템 부족 등으로 지금의 현실은 매우 혼란스럽다"고 전했다.

감염병을 연구하는 마미 타니우치 버지니아대 박사는 "백신을 접종한 여행자의 위험은 현저히 줄어드는 게 사실이지만 관광업 종사자들이 감염 위험에 노출되는 점이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백신 접종을 하지 않은 관광업계 종사자들에게 서비스를 요구하는 백신 접종 여행자들의 윤리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이에 따라 각국 정부는 관광업 부활을 위해 관광 재개에 시동을 걸면서도 조심스러워하는 분위기다. 특히 유럽은 지난해 여름 휴가철이 끝난 뒤 코로나19 재유행으로 큰 어려움을 겪은 경험이 있다.

17일부터 해외여행을 허용하기로 한 영국 정부의 계획과 관련해 스코틀랜드 국민당(SNP) 정치인 필리파 휘트포드는 "해외여행 조기 재개로 제2의 코로나19 확산을 맞았던 지난해 실수로부터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고 영국 매체 더위크가 전했다.

김소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