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의 '조정되고(calibrated) 실용적 북핵 접근법'의 실체가 모호하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동시적·단계적 비핵화 협상을 열어둔 점에서 '외교'를 우선순위로 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지만, 제재와 인권 등 기존 대북압박 기제를 활용할 뜻도 명확히 하고 있어서다. "대화의 문은 열려있다"면서도 제재를 강화해 북한의 비핵화를 유인한다는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전략적 인내'의 틀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분석도 나온다.
미 고위 관료들은 바이든 행정부의 새 대북정책이 '외교'에 방점이 찍혀 있다고 밝히고 있다. 영국 런던에서 열린 주요 7개국(G7) 외교·개발장관회의에 참석한 토니 블링컨 미 국무부 장관은 지난 3일(현지시간) 기자회견에서 "새 대북정책은 북한과 외교를 모색하려는 것"이라며 "북한이 외교적으로 관여할 기회를 잡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앞서 백악관은 새 대북정책에 대해 "트럼프식 일괄타결도 오바마식 전략적 인내도 아니다"라며 과거 정부의 대북접근법과의 차별성을 강조한 바 있다.
이번 G7 외교·개발장관회의 곳곳에서 드러난 미국의 대북구상은 '압박'에 무게가 실렸다. 5일(현지시간) 발표된 공동성명에는 제재 이행과 함께 북한이 극도로 민감해 하는 인권 문제에 대한 우려가 담겼다. 공동성명 중 북한과 관련한 부분 맨 앞에 '북한 인권'을 배치했다. 바이든 행정부가 출범 전부터 강조해 온 인권 유린국가들에 대한 압박 기조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공동성명에는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으로 북한의 모든 불법 대량파괴무기와 탄도미사일을 포기(CVIA·complete verifiable and irreversible abandonment)하는 목표를 유지한다"라고 명기됐다. 트럼프 행정부에서 사용해온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denuclearization) 또는 폐기(dismantlement)'를 이르는 CVID와는 다른 생소한 표현이다. 개념상 큰 차이는 없어 보이지만 CVID 표현에 반발하는 북한을 의식해 CVIA를 사용한 것으로 해석된다.
블링컨 장관은 같은 날 진행된 한미일 외교장관회담에서도 북한 비핵화를 위해선 제재 이행에 차질이 없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네드 프라이스 국무부 대변인은 "(한미일 장관이) 핵확산 방지를 위한 유엔 회원국들의 안보리 (제재) 결의를 완전히 이행할 필요성에 대해 동의했다"며 '제재'에 무게를 뒀다.
결국 바이든 행정부의 입장은 북한과의 대화를 모색하면서도 제재와 인권을 양보하지 않겠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이에 박원곤 이화여대 교수는 "미국의 새 대북정책은 북한을 대화로 끌어낼 뚜렷한 명분을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이 대북적대시 정책, 즉 제재를 먼저 내려놔야 대화에 나서겠다는 북한을 유인할 '당근'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워싱턴포스트(WP) 외교·안보 칼럼니스트인 조시 로긴도 이날 칼럼에서 "미국의 계획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긍정적 조치를 취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인데, 이런 일은 조만간 일어날 것 같지 않다"고 전망했다. 또 "(바이든 행정부의 새 대북정책은) 버락 오바마 시대의 정책인 '전략적 인내'로의 복귀처럼 들린다"고 지적했다.
차두현 아산정책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미국은 인권과 제재 모두 내려놓지 않을 것이고, 유리한 협상 고지를 차지한 다음 대화에 응하겠다는 북한의 패턴도 변하기 어려워 보인다"며 "결국 북미가 누가 더 오래 버티냐의 싸움을 이어갈 것"이라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