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회에는 경기 화성시 남양군도의 서쪽 끝 바닷가까지 간다. 서울에서 대중교통으로 가려면 사당역에서 광역버스 1002번을 타고 수원을 거쳐 화성으로 가게 된다. 하지만 서울과 남양군도 사이에 위치한 시흥시, 안산시, 그리고 지금은 군포시와 안산시 사이에 쪼개져 사라진 옛 반월면에 흥미로운 답사 포인트들이 있으니, 이번만은 예외적으로 지인들의 자가용을 빌려 타고 제2서해안고속도로를 따라 시흥-안산-화성으로 가면서 시흥시와 안산시를 살피고, 아울러 반월면에 대해서도 언급할 것이다.
이 연재의 지난 회에 답사한 경기 시흥시 목감동. 이곳에서 동남쪽으로 직선거리 3㎞ 정도 내려가면 경기 안산시의 조선시대 중심지였던 수암동이 나온다. 이곳에는 안산읍성과 안산객사가 일부 남아 있다. 조선시대 군의 중심지이니 읍성, 객사와 더불어 향교가 있어야 할 텐데, 안산향교는 광복과 6·25전쟁을 모두 거친 뒤인 1957년에 철거되었다.
옛 안산군의 중심지이던 수암동은 이처럼 쓸쓸한 상태로 남아 있고, 오늘날 대부분의 한국 시민은 안산시라고 하면 그 남쪽의 공업지대와 배후 주거단지를 떠올릴 것이다. 이 신도시는 처음에 반월신공업도시라 불렸는데, 이는 안산시와 군포시 사이에 자리하던 옛 반월군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다. 반월신공업도시의 건설이 완료된 뒤, 해당 지역의 옛 유래를 따져서 안산군의 이름을 가져와 안산시로 바꾸어 부르게 된 것이다.
시흥시는 조선시대 시흥군과 거의 관련이 없을 뿐 아니라, 시의 북부, 중부, 남부 간에도 상호 연관성이 크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염전으로 유명하던 시흥시 남부 지역은 오늘날 매립되어 공업단지가 되었으며, 이 시흥시 남부의 공업지대는 같은 시흥시 북부·중부보다는 동쪽의 안산시와 더 긴밀한 교류를 맺고 있다. 시흥시와 안산시의 공업단지는 사실 하나의 단위를 이루고 있으며, 서쪽의 시흥 측은 '반월특수지역 시화지구', 동쪽의 안산 측은 '반월국가산업단지'라 불린다.
안산시에 공업단지가 조성될 당시, 이 지역은 '반월신공업도시'라 불렸다. 이 '반월'이라는 이름은 안산시와 군포시 사이에 자리하던 옛 화성군 반월면에서 비롯되었다. 반월면은 차례로 광주군·안산군·수원군·화성군에 속해 있다가, 1983~94년에 걸쳐 군포시·안산시·의왕시·수원시로 쪼개져 사라졌다. 안산선 또는 서울지하철4호선 연장구간의 반월역은 안산시에 편입된 지역에 자리하고 있으며 구반월이라 불린다. 이에 대해 오늘날의 안산시 중심 지역은 신반월이라 불린다.
염전에서 공업도시로 바뀐 시흥 남부와 안산처럼 반월은 현재의 안산·시흥 공업단지와는 상당히 거리가 먼 곳에 위치한 지역이다.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반월'을 이 지역의 대표 지명으로 채택한 것은, 서울 인구 분산을 목적으로 건설될 공업도시가 서울에서 멀다는 느낌을 주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사람들이 원래 살던 곳에서 떠나서 다른 곳에 정착하는 움직임에 관심이 많은 나는, 안산시가 이주민의 도시라는 느낌을 받는다. 2019년 12월에 안산시 초지역 인근에서 '경기도 이주노동자의 구직 과정과 불법파견 노동 실태' 심포지엄이 열렸다. 이런 모임이 왜 초지역 인근에서 열리는지 궁금했는데, 현지를 가보니 이곳이 안산의 공업단지와 주거단지 사이의 딱 중간지대였다.
그런데 이 지역에는 이주민의 흔적이 또 하나 있다. 초지역 북쪽의 화랑유원지이다. 이 유원지의 이름인 화랑은 일반적인 신라 화랑이 아니라, 인천 부평 지역에서 이곳으로 이주한 6·25 전쟁 당시의 상이용사촌 화랑농장을 뜻한다.
화랑유원지에는 안산시를 구성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고국을 기리는 아시아웨이라는 기념물도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세월호. 내가 시흥·안산 지역을 처음 답사한 2017년 10월에 화랑유원지 주차장에는 세월호 사고의 사망자들을 추도하는 정부합동분향소가 설치되어 있었다. 영구적인 추모공원도 이곳 화랑유원지에 조성된다고 하니, 안산시에서 화랑유원지가 지니는 상징성은 앞으로 더욱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한편, 사할린에 징용으로 갔던 조선인과 그 가족들 가운데 귀국한 분들은 한대앞역의 고향마을1단지 아파트에 정착하셨다. 아파트단지 근처에는 러시아 식당들이 많이 보인다. 그리고 반월특수지역 시화지구의 원형인 군자염전 옆을 달리던 수인선을 건설하기 위해 평안도 사람들이 정착했다고 해서 '평안촌'이라 불리던 마을이 서울지하철4호선 정왕역과 오이도역 근처에 있다. 정왕역 쪽은 웃평안촌, 오이도역 쪽은 아래평안촌이라 불렸다. 한반도 북부로부터의 이주민, 사할린 귀국 동포, 6·25전쟁 상이용사촌 이주민, 그리고 반월신도시로 이주해온 수많은 한반도 남부 출신자와 외국인 노동자까지, 안산은 이주민의 도시다.
시흥과 안산을 관통한 제2서해안고속도로는 시화호를 지나 화성시 송산면 고정리의 송산그린시티에 들어선다. 송산그린시티 전망대가 서있는 곳은 우음도라는 섬이었다. 우음도가 서해안의 외딴 섬이었던 당시에 세워진 고정초등학교 우음분교장은 폐교한 지 오래다.
오늘날에는 자가용만 있다면 제2서해안고속도로를 통해 곧바로 화성시 서쪽의 남양군도 한복판인 마도면까지 진입할 수 있지만, 예전에는 화성군 반월면에서 옛 남양군의 행정중심인 남양읍을 거쳐야 마도면에 진입할 수 있었고, 이곳에서 계속 서쪽으로 가면 송산면 사강리·고포리, 서신면 지화리·전곡리·궁평리, 선감도·대부도·탄도·제부도 등의 남양반도 가장 끝에 도달했다.
오늘날 화성시청이 자리하고 있는 남양읍은, 예전에는 화성시의 이름이 비롯된 화성군과는 별도의 행정단위였던 남양군의 중심이었다. 화성시의 전신인 화성군은 1896년에 수원군으로 이름을 바꾼 뒤 1914년에 남양군을 흡수했다. 현재 남양읍사무소 뒤편에는 남양군과 수원군 시절의 각종 비석이 모여 있는데, 그 가운데에는 1922년(다이쇼 11년)에 세워진 '효자 서백호 찬송비'나 1941년(쇼와 16년)에 세워진 '수원군 음덕면장 오카다 겐이치 불망비' 등, 이 지역이 식민지 시기에는 수원군이었음을 시절을 느끼게 하는 비석들이 있다.
최근 들어 옛 화성군 쪽의 중심 근처에 동탄신도시가 건설되면서 인구 무게중심이 다시 동쪽으로 쏠리면서, 화성시의 동쪽과 서쪽의 불균형이 다시 한번 커지고 있다. 그래서 과연 동탄을 중심으로 해서 화성시의 인구가 100만 명을 넘게 되면 이 시가 이름을 동탄시로 바꾸게 될지, 그렇게 되면 더욱 큰 소외감을 느끼는 남양시가 화성시에서 떨어져 나갈지 등등의 추측을 하고는 한다. 또한 송산그린시티가 계획대로 모두 건설되면 남양신도시와 함께 대서울의 서남부 경계 지역으로서 기능하게 될지, 아니면 대서울과는 독립적인 생활권으로서 자리할지, 아니, 과연 송산그린시티가 예정대로 모두 건설될지가 주목할 포인트다.
남양반도에서 서울로 가는 옛길을 따라 형성된 3대 시장 가운데 가장 서쪽에 있는 사강장은 송산면 사강리에 있다. 이곳에는 남양반도 곳곳으로 향하는 노선버스들이 모이는 사강터미널을 비롯해서 화성제일신협, 송산농협 등의 기간시설이 밀집되어 있는 한편으로, 독립운동가 왕광연이 살던 집을 포함한 오래된 길과 건물도 남아 있어서 반나절 정도 찬찬히 둘러볼 가치가 있다.
사강시장은 남양반도 일대의 어업 중심지이기도 하다. 사강시장의 중심도로에 서있는 어떤 건물에는 '시화지구 어촌계 협의회'와 '남양반도 수산인 협의회'가 입주해 있고, 시장 곳곳에는 시화호 간척으로 인해 어촌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고포리 마산포에서 이곳으로 이주한 어부·횟집·주민들의 흔적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마산포는 구한말 때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 민씨 간의 정치 투쟁에 개입하기 위해 대청제국 측이 파견한 군대가 상륙한 곳으로 유명하다. 청군에 납치된 흥선대원군이 묵었다고 추정되는 집도 마산포에 있다. 마산포가 유명한 또 하나의 이유는 마산포의 명물이던 '남양 석굴'이었다. '한국의 발견 경기도'에서는 굴이 유명하던 남양군에서도 특히 마산포의 굴이 유명했다고 적고 있다. 물론 이제는 마산포가 육지가 되었으니 굴은 나지 않는다.
마산포에서 바다 건너 맞은편에는 어도라는 섬이 있다. 이제는 마산포와 어도 사이의 바다가 육지로 바뀌어 어도는 섬이 아닌 산이 되었고, 펜션과 경비행기 연습장으로 꽤 유명한 곳이 되었다. 시화호가 간척되기 전, 사람들은 어도와 마산포를 오고가기 위해 배를 이용했다. 하지만 배를 타면 위험하기도 하고 시간도 걸려서 주민들이 불편해하자, 김주용(金周容)이라는 사람이 어도와 마산포 사이에 다리를 놓아주었다고 한다. 1919년에 제작된 지도에는 어도와 고포리(마산포) 사이에 점선으로 길이 이어져 있다는 표시가 되어 있다.
그런데 1956년에 제작된 지도를 보면 1919년 지도에 보이는 어도와 마산포 사이의 길이 사라져 있다. 아마도 광복 후에 다시 바닷물에 쓸려가서 다리가 사라진 것 같다. 그래서 어도의 주민들은 1971년과 74년 사이에 다시 한번 섬과 마산포 사이에 다리를 놓는다. 개미처럼 달라붙어서 건설했다고 해서 '개미다리'라 불리는 이 다리는 제3공화국에서 추진한 새마을운동의 성과로서 주목되어, '1974년 새마을운동- 시작에서 오늘까지'(내무부)의 제3장 ‘74 새마을운동 성공사례'의 첫 번째 사례로 실릴 정도로 중시되었다.
씨랜드와 선감학원사당에서 1002번 버스를 타고 남양읍·남양신도시·사강을 지나 제부도유원지에서 내려 조금 남쪽으로 가면 궁평항이 있다. 이곳에는 1999년 6월 30일에 발생한 씨랜드 청소년수련원 화재 사고 현장이 있다. 씨랜드의 인허가가 불법으로 점철되었음을 확인하고 이의 승인을 거부했던 화성군청의 이장덕 계장은, 사건 이후 사회적으로는 '의인(義人)'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군청 내에서는 계속 계시기 쉽지 않으셨던 듯 사건 이듬해에 명예퇴직하셨다.
내가 이곳을 방문한 2018년 5월에는 아직 사고 당시의 수영장이 남아 있었는데, 그 후에 들으니 얼마 전 수영장 시설이 철거되었다고 한다. 세월호 사고처럼 씨랜드 사고에 대해서도 사회적으로 추모분위기가 컸고, 사고 현장에 추모 시설을 설치하는 문제로 논란이 이어졌다고 알고 있다. 부디 이곳에 세월호 추모공원과 마찬가지 맥락의 추모시설이 세워지기를 바란다. 현재 궁평항에는 해송(海松) 군락지 산책 코스는 잘 안내되고 있지만 씨랜드 참사와 관련된 안내문은 없다. 남양반도 서쪽 끝의 외딴 섬 선감도에 있던 선감학원에서 억울하게 죽어간 소년들의 흔적이 현지에서 거의 안내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남양반도의 서쪽 끝에는 씨랜드와 선감학원이라는, 숱한 청소년들의 불행을 전하는 두 곳의 현장이 있다. 씨랜드는 현장이 철거되었고, 선감도는 경기창작센터로 개조되어 당시의 흔적을 찾기 어렵다. 선감학원에서 사망한 소년들의 죽음을 기리는 선감역사박물관은 외딴 곳에 설치되어 있어서, 경기창작센터 앞의 너른 장소에 설치된 모 경기도지사 선정비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이 선정비가 세워진 1967년에는 선감학원에서 소년들에 대한 학대가 진행 중이었지만 주민들은 그 사실을 몰랐거나 모른 척했다는 증언들을 생존자 소년들이 하고 있다. 씨랜드와 선감학원은 근현대 한국 사회의 문제를 가장 비극적으로 드러낸 장소다. 이들을 지우고 감춘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대서울의 서남쪽 끝, 남양반도에서 이제는 사라진 바다를 바라보며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