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오세훈

입력
2021.05.06 19:00
26면
취임 한 달 오 시장, 초반 우려 딛고
광화문광장 무상급식 등 신중·전향 행보
정권심판 아닌 문제해결능력 입증해야

만약 오세훈 서울시장이 광화문광장 공사를 중단하고 원점에서 재검토한다고 발표했다고 치자. 그래서 공사현장이 저 상태로 몇 달간 방치되고, 새로운 '오세훈표 광화문광장'이 설계돼 또다시 땅을 파헤친다고 가정해보자. 4·7 보궐선거에서 그를 지지했던 57%의 서울시민들은 그때도 과연 박수를 쳐줄까.

공사가 시작된 뒤로 광화문쪽에 차를 몰고 갔다가 낭패 본 게 한두 번이 아니다. 광화문 정문 앞 유턴이 없어져서 1차선 한복판에서 멘붕이 온 적도 있고, 세종문화회관 뒤에서 세종대로에 진입했는데 시청 방향 직진차로가 사라져 몇 바퀴를 돌며 '욱'한 적도 있다. 택시를 타고 이 근처를 지날 때면 기사분들 입에서 좋은 얘기를 들은 기억이 없다. 완공 후 얼마나 근사한 광장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지만, 그때까지 겪어야 하는 이 불편함과 짜증이란!

이런 게 민심 아닐까 싶다. 정권의 독주와 정책 실패를 심판하는 것도 민심이지만, 땅을 파헤치고 덮었다가 또 파헤치는 꼴을 더는 못 봐주는 것도 민심이다. 아무리 선거에 압승한 오 시장이라 해도 덜컥 공사 중단부터 선언했다면, 아마 분위기는 싸늘해졌을 것이다. 그가 이런 민심을 읽은 건 다행스러운 일이다.

유치원 무상급식을 추진하겠다고 밝힌 건 더 의외였다. 무상급식은 정치인 오세훈에겐 주홍글씨다. 2011년 무상급식 주민투표 실패로 그는 시장직만 잃은 게 아니라, 보수진영 차기 리더의 가치도 잃었다. 정치인으로선 참으로 치욕적인 '애먼 데 승부 거는 사람'으로 희화화되며, 선거란 선거에선 계속 패하는 '잃어버린 10년'의 암흑터널을 지나야 했다.

이쯤되면 무상급식은 그에게 트라우마이고, 피하고 싶은 독배다. 더불어민주당이 장악한 서울시의회 의장의 유치원 무상급식 제안 배경에는 '오세훈의 가장 아픈 곳'을 건드린다는 정치적 계산도 엿보였다. 하지만 반대하는 순간 오 시장은 또다시 무상급식 블랙홀로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 그래서 그냥 무대응으로 빠져나갈 걸로 예상했는데 뜻밖에도 그는 수용카드를 뽑았다. 그것도 조기 추진에 어린이집 급식비 인상 역제안까지 얹어 정면돌파했다. 이로써 오 시장은 오랜 주홍글씨를 상당부분 지우게 됐고, 여기에 아이들을 챙기고 시의회와 협치하며 중도외연을 넓히는 행정가란 값진 정치적 자산까지 불리는 데 성공했다.

사실 출발은 좀 불안했다. 후보 시절 재건축 기대가 워낙 높았던 터라 오 시장 취임은 그 자체가 집값 상승 요인이었다. 서울 독자방역을 얘기했을 때는 너무 쉽게 생각한다는 인상도 줬다. 그러나 이후 매우 신중하고(부동산 완화, 속도조절) 안정적이면서도(광화문 공사 계속, 서울시 물갈이 인사 배제), 전향적이고(무상급식 수용, 박원순 성폭력 피해자에 사과) 소통지향적(기자회견, 현장방문, 시의회협력)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냉정히 말해 4·7 보궐선거는 누가 나와도 야당이 이기는 게임이었다. 예선에서 나경원, 안철수를 연파하는 저력을 보여줬지만, 최대 승리 요인은 누가 뭐래도 민심이반이었다. 그러나 1년 뒤 서울시장 선거에서도 정권심판론이 계속 살아 작동하리란 보장은 없다. 내년 선거는 프레임 아닌 온전히 본인 역량으로 승부해야 한다는 걸 오 시장 본인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정치인들 생각만큼 국민들은 보수, 진보, 중도의 진영 구분에 큰 관심이 없다. 가치보다는 능력이다. 젊은 세대로 갈수록 더 그렇다. 투표의 핵심 잣대는 절박한 나의 문제를 과연 해결해줄 수 있느냐다. 1년의 짧은 시간, 여소야대의 서울시-의회환경에서, 중앙-지방정부의 책임경계가 모호해 무조건 정권 탓으로만 돌릴 수 없는 숱한 난제들을 과연 오 시장은 어떻게 풀어갈까.



이성철 콘텐츠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