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 속 기찻길의 변신… 푸른 숲으로 회색도시 숨통 틔웠다

입력
2021.05.14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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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광주 푸른길공원

지금은 없어진, 광주 도심 속 기찻길 흔적을 따라 걸었다. 두 시간쯤 걸었을까. 평일(11일) 오후인데도 그 길을 들고 나는 사람이 쉴 새 없이 이어졌다. 대부분 산책 나온 이들이다. 밖에서 보면 이 길은 가로수가 줄지어 늘어선 그저 그런, 대로변 인도로 여기기 십상이다. 그도 그럴 것이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옆으로 돌면 고층 콘크리트 아파트 벽이, 돌아서면 검은 아스팔트가 시야에 든다. 숨막히는 길 밖 풍경이 그만큼 길의 운치를 반감시킨다. 그러나 그 길 위로 발을 들이면 사정은 달라진다. 도심을 관통하는 나무터널이 무려 8.1㎞나 이어진다. 산길에서나 접할 수 있는 감흥을 도심에서 느낄 수 있다. 150만 명이 모여 사는 대도시에 이처럼 크고 긴 숲길이 있는 건 매우 드문 일이다. 길에서 만난 최수민(49)씨는 "이곳에 들어오면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아 거의 매일 이 길을 걷는다"고 했다.


옛 철길 8.1㎞의 변신

무등산, 광주천과 함께 광주의 3대 생태축으로 자리 잡은 '푸른길공원'이다. 선형(線形) 녹지공간(12만227㎡)으로 도심의 허파 기능을 한다고 해서 '생명의 띠'로도 불린다. 어떤 이들은 "가장 광주다운 숲길"이라고도 정의했다. 푸른 길이 만들어지고, 가꿔지는 과정에 평가의 방점을 찍은 것이다.

푸른길은 원래 철길이었다. 경전선, 그러니까 경상도와 전라도를 연결하는 철도 노선 중 광주~여수(155㎞) 구간의 일부였다. 1930년 12월 개통된 광주~여수 간 철도는 광주와 전남 화순, 보성, 여수를 잇는 주요 교통수단이었지만 1970년대 들어서면서 도시 발전의 걸림돌로 꼽혔다. 도심이 팽창하면서 열차 사고로 인한 인명 피해가 늘고 소음과 진동, 분진 등으로 철도 주변 생활 환경이 악화한 탓이다. 특히 땅값 하락에다가 철도 양쪽으로 10m 떨어진 지점까지 시설녹지로 묶이면서 재산권 행사에 제약을 받은 주민들의 경제적 박탈감은 심각했다. "철도를 이설하라"는 주민들의 요구가 10년 넘게 이어졌고, 1989년에야 광주역~남광주역~효천역 구간 폐선 결정이 내려졌다. 그나마 정부 예산 부족으로 철도 이설 공사(효천역~서광주역~광주송정역)가 시작된 것은 그로부터 6년 뒤였다.

어쨌거나 철길 주민들은 수십 년 만에 '기찻길 옆 오막살이'를 면할 수 있겠거니 했다. 하지만 그 기대는 오래가지 못했다. 1998년 광주시가 폐선 부지를 도시철도 2호선과 연계해 경전철 부지로 활용하는 방안을 모색하면서다. 주민들은 발칵 뒤집어졌다. "우리보고 그냥 죽으란 이야기냐.", "레일을 뜯어내고 다시 레일을 깔겠다는 게 말이 되냐." 참다못한 주민 300여 명이 "폐선 부지를 녹지로 활용해달라"는 연판장을 광주시에 내며 행동에 나섰다.

주민들이 쏘아 올린 작은 공은 지역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환경단체와 시민단체들이 주민들을 적극 지지하며 폐선 부지를 '푸른길'로 만들자는 화두를 던졌다. 이들은 2년여 동안 30차례가 넘는 토론회와 포럼 등을 통해 푸른길 조성에 대한 구체적 대안을 제시했다.

전문가들도 화답했다. 도시계획에서부터 조경, 도시생태, 환경뿐만 아니라 문학, 예술, 인문사회 분야에 걸친 학자들이 푸른길 조성이 광주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심도 있게 분석했다. 푸른길 만들기 운동이 지역 사회 각계각층으로 들불처럼 번진 것이다. 반면 광주시를 향한 비난의 목소리는 커졌다. 결국 광주시는 두 손을 들었다. 2000년 12월 당시 고재유 광주시장은 10.8㎞에 달하는 폐선 부지를 녹지공간으로 조성키로 하고 시민들과 전문가들의 참여를 요청했다.


'헌수운동'이 일군 '공간혁명'

푸른길 조성이 결정됐지만 일부에선 여전히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뒷말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시민들은 스스로 푸른길가꾸기운동본부를 결성해 100만 그루 헌수운동을 펼치며 푸른길의 중요성을 알렸다. 푸른길의 최대 수혜자인 주민들의 자발적 참여를 끌어낸 것이다. 광주시도 공사 설계에서부터 시공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에 시민, 광주시의회, 사회단체, 전문가 등이 참여하는 자문위원회를 구성해 다양한 의견을 반영했다. '공간 혁명'을 시도한 것이다.

시민들과 광주시는 3년 동안 수백 번의 논의를 거쳐 폐선 부지를 공원으로 지정하고 녹슨 레일과 기름에 전 침목을 걷어내기 시작했다. 대신 그 길에 느티나무와 단풍나무, 이팝나무, 왕벚나무 등 132종의 수목과 꽃을 심었다. 남구와 동구 13개 동을 지나는 푸른길에 시민들이 십시일반 모은 나무가 심어지자 기업과 각종 단체들도 동참했다. 시민 참여는 나무뿐만 아니라 벤치 기증, 기념정원 조성, 기업과 단체의 푸른 숲 기부 등 다양한 참여를 이끌어냈다. 이렇게 마을과 마을을 잇는 푸른길공원은 11년 만인 2014년 전 구간이 완성됐다.

폭 2~26m짜리 이 길은 숲터널이 쭉 뻗거나 굽이치듯 이어지며 가끔 작은 광장과 만나는 비교적 단순한 구성으로 이뤄졌다. 하지만 푸른길이 낳은 효과는 상상을 뛰어넘는다. 녹도(綠道)가 삭막한 도시의 생명성을 증대시킨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주변 마을까지 살려냈다. 당장 푸른길이 놓이자 이 길이 철길이던 시절 철도를 등지고 있던 집과 상가들이 대문과 출구를 푸른길 쪽으로 냈다. 하루 평균 2만여 명의 시민이 걷고 소통하면서 빚어낸 자연스러운 결과다. 푸른길 옆에 장(진월동 토요장터)이 서고 주변 상권이 되살아난 것도 마찬가지다. 동구 동명동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김모(60)씨는 "지금은 신종 코로나 여파로 장사가 죽을 쑤고 있지만 그 전엔 푸른길이 먹여 살린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사람 모이고, 등돌린 대문 돌아앉고

원주민들의 정주 여건 개선은 주변 동네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대표적인 곳이 동구 산수동과 계림동이다. 시민들이 푸른길공원 조성 원칙을 관광지 개념의 다른 공원들과 달리 원도심 정주성 강화에 두기로 하면서 자연스레 도시재생사업이 이어지고 있다. 조준혁 (사)푸른길 사무국장은 "푸른길로 원도심 재생이 이뤄지고 '숲세권'이 형성되면서 원도심과 이어진 주변 마을에서도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며 도심이 활기를 띠고 있다"며 "이 때문에 원도심 주민들 사이에선 '여기가 푸른길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자존감이 높다"고 했다. 특히 계림동 푸른길 인근에선 빈집이나 빈 점포를 활용한 청년창업과 마을 활성화를 동시에 잡는 '청년창업 채움 프로젝트'도 진행되고 있다. 디지털3D 미디어 콘텐츠 공방이나 전시공간, 카페 등 10곳이 문을 열었다.

푸른길은 문화향유 공간으로서 역할도 톡톡히 하고 있다. 이곳에 조성된 소광장(산수광장·광복천광장)에선 기초자치단체와 동네 동아리, 민간단체 등의 문화공연이 수시로 이뤄진다. 또 푸른길 주변에 책방들(산수동 푸른길공원 주변 독립책방거리)이 생기고 도서관(진월동 작은도서관)이 열리며, 사랑의 밥차(진월동 광복천광장)도 등장했다. 푸른길을 매개로 동네 주민들이 문화를 즐기며 독특한 '푸른길 문화'를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인데, 그 지독했던 기적(汽笛)을 생태와 문화, 사회, 경제를 살려내는 기적(奇跡)으로 바꿔가고 있는 셈이다. 덕분에 푸른길은 만남과 소통, 휴식, 문화공간 등으로 자리매김하면서 2015년 10월 아시아 도시 경관상을 받기도 했다.

이런 푸른길에 상처도 있다. 남구 백운광장 구간이 도시철도 2호선 건설 공사와 백운고가 철거 등으로 끊기면서 보행축과 녹지축이 훼손된 상태다. 남구는 그간 보지 못했던 푸른길 공중보행로(길이 207m 폭 4~8m, 높이 5~6.5m)를 설치하고 광장과 밀접한 남구청사 외벽에 미디어 파사드(외벽 조명 투시 광고판)를 설치키로 했지만 단절된 푸른길을 어느 정도 되살릴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더구나 푸른길을 따라 500m 구간에 로컬푸드존도 조성키로 하면서 미관 훼손은 물론 관(官) 주도의 인위적 상권 형성에 따른 기존 상인들 반발도 우려된다. 푸른길공원 관리를 둘러싸고 전국 최초로 주민 등으로 구성된 공원관리·운영위원회와의 갈등도 불거질 수 있다.

남구 관계자는 "푸드존은 백운광장 인근에 조성된 푸른길공원과 연계해 주변 지역 의 상권 활성화를 꾀하기 위한 것"이라며 "우려 부분을 보완해 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광주=글·사진 안경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