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왕 루이 7세는 밤잠을 설쳤다. 아키텐 공작인 알리에노르와 앙주 백작이자 노르망디 공작인 헨리 플랜태저넷이 결혼했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결별한 지 8주밖에 안 되었는데 그새 재혼하다니!’ 왕좌에 앉아 있다가도 정원을 거닐다가도 불쑥 이 생각이 날 때면 루이 7세는 전 배우자인 알리에노르가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곱씹을수록 배가 아팠다. ‘노르망디와 앙주 땅을 상속받아 부모 덕에 꿰찬 녀석이 결혼 상대라니!’ 둘이 결혼했으니 아키텐 땅까지 합하면 그들의 영토는 광대하기 그지없었다. 땅만 놓고 보면 도대체 누가 프랑스의 왕인지 모를 지경이었다.
헨리의 핏속에 흐르는 바이킹들은 스칸디나비아반도에서 유럽으로 내려와 약탈을 일삼던 노르만족이었다. 이들이 하도 골치 아픈 나머지, 선대 왕이 제발 백성을 괴롭히지 말라고 떼어준 땅이 노르망디(노르만족의 땅) 아닌가. ‘그런 녀석 따위가!’ 잠들지 못하는 밤이면 루이 7세의 머릿속은 다음과 같이 뒤죽박죽이 됐다.
'헨리 1세(헨리의 외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인 노르만 족장 롤로는 서프랑크 왕 샤를 3세에게 충성을 맹세했지. 그 대가로 봉신(주군에게 봉사하고 대가로 봉토를 받는 사람)이 되어 노르망디 공작으로 봉해졌고 말이야. 윌리엄 1세(헨리의 외증조부)는 또 어떤가. 바다 건너 잉글랜드를 정복해 왕위에 올랐지. 프랑스 왕의 봉신인 노르망디 공작이 잉글랜드 왕이 된 게지. 듣자 하니 그들은 프랑스 땅에 살면서 잉글랜드의 왕 노릇을 한다지! 영어나 나불대는 섬나라 사람들이 그들이 말하는 프랑스어를 알아듣기는 할까. 아니지, 이러다 정말 헨리가 잉글랜드 왕이 되는 건 아니겠지.'
꿈이 절실하면 이루어지듯, 걱정도 깊으면 이루어진다. 루이 7세의 우려대로 2년 뒤 헨리는 잉글랜드 왕좌에 오른다. 헨리 2세가 된 그는 곧 웨일스와 스코틀랜드까지 평정한다. 결혼으로 얻은 알리에노르의 영지를 포함해 피레네 산맥까지의 광활한 영토가 헨리의 발밑에 놓인 것이다. 이 시기의 플랜태저넷 가문의 나라를 앙주 제국 또는 플랜태저넷 제국이라고 부른다.
앙주 제국의 노른자는 알리에노르가 가져간 아키텐 땅이었다. 와인으로 거두어들이는 세수가 엄청났기 때문이다. 이러니 루이 7세가 불면의 밤을 보내는 것도 당연했다.
어느 날 밤. 루이 7세는 아깝기 그지없는 아키텐의 와인으로 시름을 달래다가 결심한 듯 잔을 내팽개쳤다. 언제까지 배 아파만 할까! 작심한 듯 루이 7세 역시 샹파뉴 백작의 딸 아델라와 세 번째 결혼식을 올렸다. 그리고 장차 왕위를 이을 왕자를 낳았다.
부왕 루이 7세의 한 맺힌 과거를 듣고 자란 필리프 2세는 복수를 계획한다. 플랜태저넷 가문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부자간 갈등이 여간 심한 게 아니었다. 내부갈등 유발이라, 기막힌 계획이었다. 필리프 2세는 아버지 헨리 2세에게 불만이 많은 왕자를 부추겨 반란을 도왔다. 막내 왕자 존에게는 형 리처드 1세가 십자군 전쟁 길에 나선 사이에 왕위를 찬탈하라고 충동질했다.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필리프 2세는 이 틈을 타 영주들을 회유하거나 전쟁을 벌여 플랜태저넷 제국의 영토를 조금씩 빼앗았다. 어느새 잉글랜드 왕 존은 영토의 대부분을 프랑스에 빼앗기고 말았다. 잉글랜드 귀족들은 부랴부랴 왕권을 제한하는 내용을 담은 마그나카르타(대헌장)를 존 왕에게 들이밀어 서명을 받아냈다. 참고로 당시 마그나카르타에 참여한 런던시장 윌리엄 하들 경은 와인 업자였고, 그는 시의회 의원의 3분의 1을 와인 업자로 구성했다.
그나마 위안이라면 아키텐 공국의 땅 가운데 알짜배기인 귀엔 지방만은 잃지 않은 것이었다. 귀엔의 보르도 와인 상인들은 전함과 군수물자를 지원하며 존왕의 힘이 되었다. 사실 보르도 상인들 입장에서는 잉글랜드가 최대 와인 시장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존 왕으로서는 고마울 따름이라 보르도에 세금 혜택이라는 큰 선물을 안겼다. 더불어 보르도 와인을 대거 주문했다. 이 무렵부터 보르도 항을 중심으로 오늘날의 보르도 지역 곳곳에 포도밭이 빼곡하게 들어섰다. 그런데 메독 지구 한 곳은 예외였다. 이 지역은 강이 수시로 범람하는 습지대였다. 이런 땅이 훗날 프랑스 최고의 와인 산지가 될 거라고 누가 예상했을까.
보르도 상인들은 보르도 와인의 특색을 살려 잉글랜드 시장을 공략했다. 맛이 가볍고 색이 연한 데다 가격도 좋은 덕분에 보르도 와인은 잉글랜드에서 인기가 좋았다. 와인 빛깔이 선홍빛 장미색에 가까워 잉글랜드 사람들은 보르도 와인을 클라레(Claret)라 칭했다. 클라레는 프랑스어 클레레(Clairet)에서 온 말이다.
클라레의 인기가 치솟자 잉글랜드의 농가는 포도 농사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둠즈데이북’에 따르면 한때 잉글랜드에도 상업용 포도밭이 1,300여 곳이나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와인을 만들어도 클라레에 밀려 찾는 사람이 없으니, 잉글랜드에서는 포도밭을 갈아엎어야 했다.
한편 땅이란 땅은 죄다 포도밭이 들어선 귀엔 지방은 유럽에서 최고로 부유했다. 잉글랜드 전체의 세수보다 귀엔 지방의 세수가 더 많았을 정도였다. 이러니 프랑스로서도 귀엔 지방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시간은 흘러 어느덧 프랑스에 새로운 왕조가 들어선다. 1328년 카페왕조 샤를 4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뒤를 이어 4촌인 필리프 6세가 즉위해 발루아 왕조를 열었다. 그런데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3세가 자신에게 프랑스 왕위계승권이 있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자신의 어머니가 샤를 4세의 여동생이니 4촌인 필리프 6세보다 3촌 관계인 자신에게 우선권이 있다는 주장이었다. 화가 난 필리프 6세는 이참에 귀엔 지방을 몰수하려고 했다. 에드워드 3세는 귀엔을 지켜내야 했기에 프랑스 왕의 가신으로 충성을 맹세하며 이 일은 일단락됐다.
그런데 프랑스가 잉글랜드와 사이가 안 좋은 스코틀랜드를 지원하자 에드워드 3세는 플랑드르에 양모 공급을 중단했다. 플랑드르는 당시 프랑스의 최대 세수원이자 모직 산업의 중심지인 터라 필리프 6세도 가만있지 않았다. 오랜 기간 눈독을 들인 귀엔 지방을 마침내 몰수해버린 것이다. 1337년 에드워드 3세는 왕위 계승권을 재차 주장하며 프랑스에 전쟁을 선포했다. 백년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에드워드 3세는 명목상으로는 왕위 계승권을 내세웠지만 최고의 세수원인 귀엔 지방을 절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 객관적 전력으로 보면 감히 넘보지 못할 프랑스에 싸움을 건 데에는 이러한 이유가 있었다.
잉글랜드의 선전포고를 받은 프랑스는 콧방귀를 뀌었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격이랄까. 그런데 막상 전쟁이 벌어지자 모두의 예상이 빗나가고 말았다. 장궁을 든 잉글랜드 병사들이 쏜 화살에 프랑스의 말들이 퍽퍽 쓰러졌고, 프랑스 기사들은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갑옷만 해도 무거운데 땅마저 질척거리니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해 번번이 싸움에서 패했다.
잉글랜드는 승전을 이어갔다. 슬라위스 해전에서 프랑스군을 꺾은 데 이어 크레시 전투, 푸아티에 전투 등에서 잇달아 승기를 올리며 프랑스 땅을 휘젓고 다녔다. 푸아티에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은 프랑스 왕 장 2세를 생포하고 노르망디와 귀엔 지방을 탈환한다.
프랑스의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잉글랜드군의 약탈도 심한 데다 흑사병까지 돌아 수많은 사람이 죽어 나갔다. 농민들이 들고일어난 자크리의 난으로 사회 혼란은 극으로 치달았다. 그나마 전염병 덕분(?)에 전쟁이 잠시 중단된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프랑스는 그 뒤로도 연전연패해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다. 엎친 데 덮친다고 샤를 5세의 뒤를 이은 샤를 6세가 정신병에 걸리자 부르고뉴파와 아르마냐크파가 권력을 서로 장악하려고 내분이 일어났다. 이 틈을 타 잉글랜드 왕 헨리 5세는 아쟁쿠르 전투에서 크게 승리하고 부르고뉴파와 손잡고 파리까지 점령한다. 잉글랜드군은 기세를 몰아 프랑스군의 마지막 요새인 오를레앙 성을 포위하기에 이른다. 이때 잔 다르크가 등장하여 오를레앙을 구하지 않았다면 프랑스는 지도에서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잔다르크는 부르고뉴파에 의해 잉글랜드군에 넘겨져 마녀라는 판결을 받고 화형으로 생을 마감했다. 하지만 잔 다르크 덕분에 기사회생한 프랑스인들은 그때부터 프랑스라는 ‘국가’의 ‘국민’이라는 자부심이 생겼고 ‘애국심’이 고취되었다고 한다.
전쟁 막바지인 1451년 프랑스는 그토록 탐내던 귀엔을 되찾았다. 하지만 300년 동안 잉글랜드에 속했던 귀엔 사람들은 프랑스 국왕에게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와인 업자들에게 과도한 세금을 징수한 탓이었다. 와인 업자들은 한술 더 떠 잉글랜드에 도움을 요청했다.
마침내 1452년 잉글랜드군 총사령관 존 탤벗이 귀엔에 잉글랜드 깃발을 다시 꽂았지만, 깃발은 얼마 나부끼지 못하고 뽑히고 말았다. 결국 카스티용 전투(1453)에서 탤벗은 전사했고 잉글랜드는 프랑스에 패하고 말았다. 116년 동안 이어진 전쟁이 프랑스의 승리로 끝을 맺었다. 이로써 귀엔 지방은 300년 만에 프랑스 땅이 되었다.
마지막 전장을 누빈 잉글랜드 기사 탤벗은 과거 포로로 잡혔을 때 “프랑스를 향해 다시는 칼을 들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그는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카스티용 전투에서 맨손으로 싸웠다고 한다. 장수가 칼 없이 전장에 나가다니... 아무튼 기사로서의 명예를 지킨 탤벗을 기리기 위해 그의 이름을 딴 와인도 생겼다. 보르도 생줄리앙 마을의 그랑크뤼클라세 4등급 ‘샤토 탈보’이다.
인고의 세월 끝에 되찾은 땅이었지만 프랑스 국왕들은 보르도가 눈엣가시였다. 그래도 ‘와인의 경제성’을 알았기에 잉글랜드로의 와인 수출까지는 막지 않았다. 대신 높은 세금을 매겨 왕실 곳간을 채웠다. 와인 상인들은 잉글랜드에도 전보다 높은 관세를 내야 했다. 자연히 보르도 와인 가격이 2배까지 오르더니 3배까지 치솟았고 수출량은 대폭 줄었다.
잉글랜드의 와인 상인 길드인 빈트너스 컴퍼니 소속 수입상들은 보르도 와인을 대체할 와인을 찾아 에스파냐 포르투갈 지중해로 향했다. 보르도 상인들도 다른 판로를 뚫어 수출처를 다각화했다. 유럽 전역에 와인을 수출할 수 있도록 국왕 허가를 받아 적은 양이지만 쾰른, 함부르크, 브뤼헤, 에든버러에까지 와인을 수출했다.
이후 보르도는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요동치는 정치 상황에 따라 고전을 면치 못했다. 당시 잉글랜드를 사로잡았던 보르도 와인은 실은 양으로 승부하는 중저가 와인이었다. 오늘날의 명성은 큰 위기를 겪으면서 품질을 높여 맛과 향이 좋은 와인으로 거듭났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보르도의 역사는 전쟁이 빚은 와인의 역사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