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센조' 좀비로 재능 낭비? 현대무용 대들보의 반전

입력
2021.05.07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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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김설진 
'이효리 춤선생' 부터 '연근 괴물' 연기까지

편집자주

훗날 박수소리가 부쩍 늘어 문화계를 풍성하게 할 특별한 '아웃사이더'를 조명합니다.



팔을 축 늘어뜨리고 그르렁 가래 끓는 소리를 내며 비틀거리며 걷는 모습이 심상치 않다. 좀비 연기에 진심인 사내에 돌아온 건 주위의 냉소뿐이다.

"근데 '소울'이 없다." "뭔가 아픈 사람 같은데?" 영화 '부산행'도 아닌 '울산행' 좀비 연기 지도자인 그는 분식집 아줌마에게 되레 연기 지적을 받고 푹 기가 죽는다. 최근 종방한 tvN 드라마 '빈센조'에서 댄스교습소 '고스텝' 원장 래리강의 모습이다.


"감독님도 몰라" 댄스 학원 원장 맡기까지

천덕꾸러기 춤 선생 역을 맡은 이는 배우 김설진(40). 반전은 따로 있다. 그는 현대 무용 강국인 벨기에 유명 무용단인 피핑톰에서 활약했고, 국내 댄서 오디션 프로그램인 '댄싱9' 시즌2 우승자다. 드라마에서 이 무슨 재능 낭비일까. '빈센조' 감독도 '얼굴은 낯선' 김설진의 이런 화려한 이력을 처음엔 모르고 섭외했다고 한다.

"오디션은 드라마 '아스달 연대기'(2019) 출연을 계기로 봤어요. '빈센조' 감독님이 전작이 뭐냐고 물으시더라고요. 그래서 넷플릭스 '스위트홈'(2020)에서 연근 괴물로 나왔다고 했죠. 맞는 역을 고민하시다 마침 드라마에 댄스 학원 원장 캐릭터가 있어 그 역을 주시더라고요." 최근 서울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만난 김설진은 "드라마에서 2000년대 초반에 유행했던 춤을 일부러 어설프게 췄다"며 웃었다. 극 초반에 어수룩하고 소심한 춤선생으로 나온 그는 숨겨둔 액션 연기로 후반에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이명세 감독 러브콜로 시작한 연기

김설진은 '인정사정 볼 것 없다'로 유명한 이명세 감독의 단편 영화 '그대 없이는 못 살아'(2017)로 연기를 시작했다. "피핑톰에서 공연할 때 대사를 하면서 춤도 췄거든요. 그때부터 연기에 더 관심을 두게 됐고, 시간이 지나면서 영상 작업에 끌리더라고요. 춤은 추는 순간 사라지잖아요. 그런 고민을 하던 차에 '전체관람가'라는 영화 제작 프로그램을 통해 이 감독님한테 갑자기 연락이 왔어요, 한번 만나자고. 친구랑 얘기하는 것처럼 재밌었고, 그렇게 작업을 했죠. 아직도 연락해요, 하하하."

김설진은 '한국의 앤디 서키스'로 통한다. 서키스는 영화 '반지의 제왕' 시리즈에서 골룸 역을 연기한 모션 연기의 달인. 김설진은 넷플릭스 화제작 '스위트홈'에서 거미, 연근, 근육, 흡혈 괴물 등의 동작을 안무하고, 직접 연기도 했다. 괴물의 움직임은 곤충에서 영감을 받아 움직임을 짰다. 작업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분장 시간만 다섯 시간, 연기뿐 아니라 다른 배우의 괴물 연기까지 챙기면서 1인 5역을 했다. 김설진은 "근육 괴물 수트는 너무 무거워 두 배우가 번갈아 연기했다"고 촬영 뒷얘기를 들려줬다.



"쟤 빼" 방송 무대에도 못 섰던 '미운 오리 새끼'

김설진은 어려서 본 영화 '백야' 속 무용수 미하일 바리시니코프를 보고 춤에 빠졌다. 소년은 거리로 나갔다. 제주에서 스트리트 댄스를 추던 그는 고2 때 서울로 올라가 방송안무팀 더댄스에 들어갔다. 이후 유명한 방송안무팀 프렌즈로 자리를 옮겼다. 김종민이 엄정화의 백댄서로, '범 내려온다' 안무를 짜 스타덤에 오른 앰비규어스댄스컴퍼니 김보람 단장이 활동할 때다. 하지만, 무대에 설 기회는 쉬 오지 않았다. 김설진은 "어떤 가수의 무대를 정말 열심히 준비했는데 매니저가 와서 '저 조그만 애 빼'라고 해 무대에 못 서기도 했다"며 옛 얘기를 들려줬다.

그런 김설진은 한예종 무용원에 들어간 뒤 2008년부터 2014년까지 벨기에에서 현대무용수로 활동했다.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8일 동안 오디션을 보고 어렵게 얻은 자리(피핑톰 단원)였다. 공연 '반덴브란데 32번지'로 세계투어를 돌기도 했다. 이후 한국으로 돌아온 김설진은 2017년 가수 이효리가 발표한 노래 '서울'의 안무에 참여했다. "SNS로 연락을 받았어요. 처음엔 반신반의했죠. 마침 제주에 공연이 있어 '공연 때 한 번 보러오세요'라고 했는데 진짜 왔더라고요. 참 멋있는 누나죠."


"참 가지가지 하죠?"

미운 오리 새끼였던 김설진은 현대무용의 대들보로 자랐고, 요즘 배우로 두 번째 삶을 살고 있다. 그는 연극 '완벽한 타인'(세종문화회관·18일~8월 1일)에서 페페 역을 맡아 관객과 만날 준비를 하고 있고, 창작그룹 무버 단원들과 단편영화 '풍경들' 촬영을 마치고 공개를 앞두고 있다. 김설진은 휴대폰을 꺼내 올 하반기 웨이브(OTT)에서 공개 예정인 드라마를 위해 파격 분장을 한 사진 두 장을 보여줬다. 지금 그의 심장이 뛰는 곳은 "카메라 앞"이다.

"지인들이 '요즘 참 가지가지 한다'고들 해요. 제가 원래 좀 가지가지 하거든요. 배역이 가진 이야기들, 그 한 사람의 인생을 쉬 놓지 않고 연기하려고요. 처음엔 춤 관련된 역이면 일부러 피했는데 이젠 아니에요. 지금 아니면 또 언제 하겠어요."


양승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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