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분히 길을 걸을 때만 보이는 것들

입력
2021.05.06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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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과 위성항법장치(GPS)가 보편화하면서 길눈이 어두워졌다. 지척에 있는 목적지조차 스마트폰 지도 애플리케이션을 실행하고서야 마음 편히 길을 떠난다. 내비게이션 없이 운전하는 일은 점점 불가능에 가까워진다. 여정에서 효율성과 속도가 중요해지면서 사람들은 길이 품고 있는 '완벽한 은유'를 알아채지 못하게 됐다. '두 발의 고독'의 저자에게 길은 "불신과 믿음, 탄생과 죽음, 생각, 희망, 구원 등 삶 자체"를 형성한다. 천천히 걷는 자만이 길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이다.

책은 운전면허증을 반납한 저자가 모든 길을 걸어 다니며 알게 된 사실들의 기록이자 에세이다. 운전대를 놓은 이유는 뇌전증 진단 때문이었다. 도보 여행자가 된 계기가 비록 비자발적이긴 했지만 그는 “이전과 달라진 삶에 금세 익숙해진 스스로에게 놀라며, 생활이 차분해졌다”고 고백했다. 늘 다니던 길조차 새롭게 다가왔다.

노르웨이의 숲을 오직 태양을 나침반 삼아 탐방하는 등 수차례 걷기 모험에 도전한 저자의 발걸음은 어느새 유년시절 부모님과 함께 걸었던 외갓집 오두막 뒷길로 향했다. 길은 공간만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 미래를 담은 시간이었던 것이다. 동시에 먼저 그 길을 걸었던 모든 이들의 역사다.

장재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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