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2월 투기 의혹으로 물러난 박은경 환경부 장관 후보자는 "자연의 일부인 땅을 사랑할 뿐 투기와는 전혀 상관 없다"는 '명언'을 남겼다. 당시 박 후보자가 구입했다가 문제가 된 땅은 농지였다.
자연의 일부인 농지는 1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 사회의 뜨거운 감자다. 투기 의혹을 받고 있는 한국토지주택공사(LH) 직원들이 구입한 땅의 99%도 농지였다. 농사 지을 생각이 있다면 누구나 살 수 있다지만, 유독 고위공직자들이 농지 구입에 앞장선 점은 의미심장하다. 정부공직자윤리위원회가 지난 3월 재산을 공개한 고위공직자(1,885명) 중 절반(45.1%)에 가까운 852명이 농지(3,778개 필지)를 갖고 있었다.
주목할 점은 이들이 농지를 소유하게 된 과정이다. 한국일보는 농지 소유 고위공직자 852명 중에서 1㎡당 가격이 5만 원 이상이면서 1만㎡ 이상 농지를 보유하고 있거나, △청와대와 국무총리실 소속 고위공직자 △인사청문회 대상 장차관 및 기관장 △투기과열 지역인 제주도와 세종시 농지 소유자 등 169명을 추려 이들이 보유한 654개 필지의 등기부등본을 집중 분석했다. 분석 결과 이들이 소유한 농지 가운데 70% 이상의 필지가 매입(375개·57.3%)이나 증여(94개·14.3%)로 취득했고, 상속 필지는 23.7%(155개)에 불과했다. 10명 중 7명은 본인 의지로 농지를 구입했다는 얘기다.
경자유전(耕者有田·농사 지을 사람이 농지를 보유함) 원칙과 농업 경영을 할 사람이 아니면 농지 취득을 제한한 농지법이 고위공직자들 앞에선 사실상 무용지물이나 다름없는 셈이다. 오세형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경제정책국 팀장은 "농지는 일반 대지와 달리 강력히 보호돼야 하는 땅"이라며 "고위공직자 절반이 농지를 갖고 있고 농지 보유자 70%가 매입과 증여를 통해 소유하게 됐다는 건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고위공직자들이 농지를 사들이는데 앞장선 이유는 취득 과정에 허점이 많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는 농지 취득 때 필수서류인 농지취득 자격증명신청서와 농업경영계획서를 정보공개 청구를 통해 확인해보니 곧바로 파악됐다. 질문에 맞지 않는 엉뚱한 답변을 적어내도, 거주지와 농지 소재지가 멀리 떨어져 영농 활동이 불가능해도, 한눈에 봐도 작물을 심기 부적절한 땅에 농사를 짓겠다고 신고해도, 농지를 취득하는데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전북도의회 김기영(51) 의원은 2014년 제주시 한경면 일대 밭 7,850㎡를 30년 지기 고향 친구와 함께 '지분 쪼개기' 방식으로 매입했다. 김 의원은 농업경영계획서에 '자기 노동력'으로 직접 마늘과 감자를 심겠다고 기재했다. 자신의 거주지인 전북 익산에서 300㎞ 떨어진 섬에서 농사를 짓겠다고 신고한 셈이다. '공문서 위조'에 가까운 행위지만 농지취득 자격증명 발급엔 제약이 없었다.
한국일보가 직접 방문한 김 의원의 제주 농지에는 감자와 기장이 심어져 있었고, 농사 짓는 사람은 따로 있었다. 김 의원 농지 인근 논에서 경작하던 마을주민 고모(74)씨는 "여기서 농사 짓는 사람들은 모두 섬 주민들"이라며 "땅을 가진 외지인이 직접 농사 짓는 건 한 번도 못 봤다"고 말했다.
김 의원은 농지 외에 인근에 임야 2,731㎡도 같은 시기에 함께 사들였다. 그는 땅을 보지도 않고 공매 사이트를 통해 샀다고 한다. 이 땅은 김 의원과 배우자, 고등학생과 중학생인 두 자녀, 김 의원 고향 친구와 그의 배우자, 자녀까지 8명이 지분을 공유하고 있다. 이곳은 당시 제주 제2공항 부지의 가장 유력한 후보지였던 대정읍 신도리와 맞닿아 있다. 김 의원의 토지 매입이 투기 목적이었을 가능성이 제기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2015년 11월 제2공항 부지는 한경면이 아닌 서귀포시 성산읍으로 결정됐지만, 한경면 일대에 중국 자본이 몰리고 관광명소로도 부상하면서 이듬해인 2016년에만 공시지가가 40% 상승했다. 제주에서 그해 두 번째로 땅값이 많이 올랐다. 김 의원은 컴퓨터 클릭 한 번으로 막대한 (미실현) 시세 차익을 올린 셈이다.
한국일보가 해당 농지 매입 경위를 묻자, 그는 "친구와 의논해 대부분의 토지를 처분하기로 합의했다"며 "매입 당시엔 의정 활동을 하지 않을 때였지만 과거의 나를 돌아보면 본의가 어떻든 후회된다. 뉘우치고 있다"고 말했다.
김 의원뿐이 아니었다. 농경계획서에 스스로 농사 짓겠다고 신고했지만, 실제론 농사 짓지 않는 고위공직자들을 찾아 보니, 골라내는 게 무의미할 정도로 수두룩했다.
농지법상 농지를 매입한 뒤에는 특별한 사유가 아니면 휴경을 할 수 없다. 무단 휴경이 확인되면 관할 지자체는 농지 소유주에게 강제 처분 조치를 취할 수 있다. 지자체는 1년간 농지 처분 의무를 부과하고 그 기간에 처분 또는 성실 경작을 하지 않으면 처분 명령을 내린다. 그로부터 6개월 후에도 처분이 안 되면 매년 농지 공시지가의 20%를 이행강제금으로 부과한다.
그러나 농지법상 규제 조항에도 불구하고, 처분하거나 다시 농사를 짓기보다는 황무지나 다름없이 버려진 농지가 적지 않았다. 경북도의회 황병직(57) 의원의 배우자 A씨는 2013년 6월 경북 영주시 단산면 좌석리 밭을 1억4,600만 원에 매입했다. A씨는 지자체에 제출하는 농업경영계획서에 '자기 노동력'으로 두류(콩) 농사를 짓겠다고 신고했다. 그러나 취재팀이 현장을 살펴본 결과, 이 밭은 수풀과 나무를 헤치고 들어가야 할 정도로 '죽은 땅'으로 변해 있었다. 좌석리 주민들과 이장은 "최근 8년 동안 농지 소유주가 여기 온 적도 없고 농사 짓는 걸 본 적도 없다"고 입을 모았다. 황 의원은 이에 대해 "처음 매입할 땐 조경수로 소나무를 심었지만, 식목이 잘 안 됐고 인건비도 안 나오는 상황이라 그냥 둘 수밖에 없었다"며 "팔려고 내놓은 지 3년쯤 됐지만 안 팔리고 있다"고 해명했다.
외국에서 근무 중인 고위공직자가 주말 농사를 짓겠다며 농지를 구입한 사례도 있었다. 이헌(57) 외교부 재외동포영사실장은 2014년 3월 경기 여주시 금사면 장흥리의 밭(420㎡)을 샀다. 이 실장 날인이 찍힌 농지취득 자격증명신청서에는 취득 목적이 '주말·체험 영농'으로 적혀 있었다. 하지만 이 실장은 2013년 7월 주홍콩총영사관 부총영사로 발령받아 농지 매입 당시 한국에 없었다. 이 실장은 "큰조카로부터 산 땅이다. 농지취득 자격증명 발급 절차도 조카가 대신했다"고 해명했다.
농림축산식품부 측은 이에 대해 "대리 신청의 경우 위임장이 있어야 한다. 더구나 외국에 있는 사람이 주말 농사를 짓겠다는 건 상식적이지 않다. 취득 목적에 맞지 않으므로 농지취득 자격증명이 발급된 건 잘못된 일"이라고 지적했다. 농지법은 '거짓이나 부정한 방법으로 농지취득 자격증명을 발급받았을 때 사유가 발생한 날로부터 1년 내에 농지를 처분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 처분까지 이어지는 경우는 드물다. 이 실장의 농지도 7년째 황무지 상태로 방치됐다. 이 밭 바로 옆 땅에서 9년째 양봉업을 하고 있는 박병덕(62)씨는 "땅 주인이 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있는데 본 적은 한 번도 없다"고 했다. 이 실장은 "농지법에 대해 잘 몰라서 벌어진 일"이라고 답했다.
'주 재배 예정 작목은? 답(畓)' '영농거리는? 1'
동문서답인가 싶겠지만 정동균(61) 경기 양평군수 배우자 B씨와 인천시의회 조광휘(56) 의원의 농업경영계획서에 실제로 기재된 내용들이다.
B씨는 2017년 10월 양평군 양평읍 대흥리의 자신 소유 대지(107㎡)와 바로 옆에 있는 타인 소유 자투리 논(96㎡)을 교환했다. B씨는 농지취득 자격증명신청서에 취득 목적을 농업경영으로, 농경계획서에 노동력 확보 방안을 자기노동력으로, 영농 착수 시기를 2018년 5월로 기입했다. 그리고 주 재배 예정 작목란에는 엉뚱하게도 '답'이라고 기재했다. 이 논은 매입 1년 9개월 만인 2019년 7월 대지로 변경됐다.
B씨의 경우 농사를 짓겠다는 계획이 실현 가능한 것인지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이 토지는 양평-횡성을 잇는 6번 국도와 양평읍 중앙로가 합쳐지는 구간에 위치한 긴 삼각형 모양으로, 두 도로의 한가운데에 자리 잡은 땅이다. 한눈에 봐도 농사용 땅은 아니다.
B씨는 2014년에도 이곳의 밭 두 필지를 농지 전용 목적으로 매입해 2년 3개월 뒤 대지로 바꿨다. 2017년에 새로 취득한 농지가 이전에 사들인 두 필지와 바로 붙어 있는 땅이다. 토지거래 전문 스타트업 관계자는 "이 땅들은 서로 연결돼 있어야 가치가 생긴다"며 "토지 활용도를 높이기 위해 농지를 추가로 매입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B씨가 잇따라 구입해 농지에서 대지로 바꾼 땅들의 공시지가는 현재 2~4배 상승했다. 인근 공인중개사는 "이 땅은 양평의 척추 라인에 해당한다"며 "(양평에선 비싼 편에 속하는) 평당 300만원(㎡당 90만원) 정도"라고 말했다.
정동균 군수는 공보팀을 통해 한국일보에 "옆 토지 소유주가 지속적으로 땅 교환을 요구해 수락했다. 농업경영을 목적으로 농지를 취득했으나 개인 사정으로 여의치 않아 방치하다가 대지로 변경한 것"이라고 밝혔다.
조광휘 의원 부부는 2011년 8월 경기 광주시 오포읍의 논 두 필지(7,924㎡)를 4억원에 매입했다. 이 논은 조 의원 부부를 포함 세 부부가 3분의 1씩 지분을 공유하고 있는데, 이들은 농지 매입을 위해 각각 2억원을 대출받았다. 땅을 살 당시에 조 의원의 거주지는 인천이었고, 농지 소재지인 오포읍과는 60㎞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농지 매입자들에게 위임장을 받아 대리인이 일괄 작성한 농업경영계획서에는 영농거리가 황당하게도 '1'로 표기됐다. 서류를 신청하는 사람이나 심사하는 해당 관청 모두 농지취득 자격증명 발급 절차를 요식행위로 인식했던 셈이다.
조 의원은 "(농지 소재지인) 광주에서 멀지 않은 성남이 외가이고, 그쪽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녔다. 농지도 외삼촌 부부와 외삼촌 지인 부부와 함께 산 것"이라고 해명했다. 허술한 농업경영계획서 작성에 대해선 "오래전 일이라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밝혔다.
농업 전문가들은 고위공직자의 농지 취득에 대해선 일반 시민들보다 더 엄격한 관리감독과 감시가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농지법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 법망을 피해가는 방법을 잘 알고 있으며, 개발정보에 대한 접근도 일반인보다 훨씬 쉽기 때문이다.
사동천 홍익대 법대 교수(한국농업법학회 회장)는 "역사적 흐름이나 최근 행태를 보면 농지 투기는 공직자가 앞장섰고 이후 일반인들에게 정착된 것으로 봐야 한다"고 비판했다. 오세형 경실련 경제정책국 팀장도 "선출직은 비리 의혹이 있으면 투표로 심판할 수 있지만, 비선출직이 대부분인 고위공직자는 견제도 쉽지 않다"며 "정책을 결정하는 중요한 자리에 있는 만큼 고위공직자의 농지법 위반과 투기 행위는 더 강력히 처벌해야 한다"고 밝혔다.
* 공직자 개인별 상세내용은 인터랙티브 페이지 <농지에 빠진 공복들https://interactive.hankookilbo.com/v/farmmap/>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