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끝> 차별 없는 아동콘텐츠를 위해
성역할 고정관념, 혐오와 차별, 폭력으로 물든 아동 콘텐츠들을 들여다보는 동안, 한국일보 마이너리티팀은 씁쓸함을 감출 수 없었다.
그 속에서 찾은 좋은 콘텐츠들이 더욱 귀하게 느껴졌다. 한부모 가정, 직업을 가진 여성, 휠체어를 타는 친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지만 아동 콘텐츠에선 좀처럼 보기 힘들었던 이웃들이 자연스레 녹아있는 작품들이다. 이런 작품을 만든 작가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2004년 첫 그림책 '구름빵' 출간, 지난해에는 ‘아동문학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상’을 한국 작가 중 처음으로 수상했다. 그의 그림책을 읽고 나면 마음이 몽글몽글해진다.
-'구름빵'에서는 엄마가 밥 하고 아빠는 늦잠 자는 4인 가족이 나왔어요.
“스토리 전개상 4인 가족 각자 역할이 필요해서 피치 못하게 그렇게 했어요. 만들면서도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었어요. 그래도 성 역할, 외모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려고 고양이 캐릭터를 쓰고, 남동생에게 꽃무늬 바지를 입혀서 남매의 옷도 모호하게 만들었어요. (출판권을 산) 일본 출판사에서는 큰 애를 오빠, 둘째를 여동생으로 하려고 했어요. 하지만 제가 그건 싫다고, 굳이 정해야 한다면 큰 애를 누나로 해달라고 했어요. 가족 구성은 그때는 ‘어쩔 수 없다’고, 신인이니까 변명처럼 생각했고 ‘다음 책부터는 그러지 말아야지’ 생각했어요.”
-실제로 이후 작품에선 다양한 가족이 나와요.
“신인 때부터 생각한 걸 반영한 거예요. 아이들이 책에서 본 걸 이상적이라고 여겨 자기는 그것에서 벗어나거나 완벽함에서 멀어져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건 해롭다고 생각했어요. 아빠가 없는 이야기를 볼 때 부모가 다 있는 아이는 ‘아빠가 멀리 있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고, 아빠와 살지 않는 아이는 ‘나랑 같네’라고 생각할 수 있으니까요. (고양이와 병아리가 가족이 되는) '삐약이 엄마'는 '구름빵'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만들고 싶었어요. 다문화 가정 아이들이 봐도 자기 이야기처럼 생각해주길 바랐어요. 입양 가족 등 여러 형태의 가족이 그 자체로 완벽한 가족이 될 수 있으니까요.”
-작품을 구상할 때부터 다양성을 염두에 두시나요.
“의도를 담아서 ‘그런 사람을 위해 써야겠다’고 작업하지는 않아요. ‘어떤 이야기를 만들면 아이들이 재미있을까’ ‘읽어주는 어른도 즐거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아이들이 쉬우면서도 빠져드는 책을 만드는 게 목표예요.”
-작품을 다듬을 때 신경 쓰는 부분이 있다면요.
“평소에 캐릭터의 성 역할은 정해주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고요, 잘못된 교훈 같은 게 있어서 아이가 잘못 적용하지는 않을까, 자기 환경과 비교해서 슬픔을 느끼지는 않을까 하는 부분에 마음이 쓰여요. 작품에는 평소 제가 어떻게 느끼고 생각하는지가 묻어나오는 것 같아요. 무섭게 묻어나는 걸 아니까 바르게 생각하려고 노력해요. 제가 바른 사람, 착한 사람은 아니지만 스펀지처럼 스며드는 아이들이 보는 것이니까 막중한 책임감을 느껴요. 의도치 않은 악영향이 있으면 안 되니까 정말 조심해야 해요.”
2015년 출간한 첫 그림책 '수박 수영장'부터 '할머니의 여름휴가' '당근 유치원' 등으로 사랑받고 있는 작가. 그의 책을 안 본 독자는 있어도 한 권만 본 독자는 없을 것이다.
-'수박 수영장'만큼 휠체어 탄 아이가 자연스레 녹아있는 작품을 본 적이 없어요.
“오래전 뉴스에서 다리가 불편한 아이가 다른 아이들과 같이 수영장에서 자유롭게 수영하는 모습을 봤어요. 그때 물속에서는 다리가 불편해도 같이 수영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는데 ‘수박 수영장’도 수영장이니까 다리가 불편한 사람도 같이 즐겁게 놀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어린이 콘텐츠에선 보기 힘들었던 이웃 할머니, 할아버지가 자주 나와요.
“'수박 수영장' 이야기를 짤 때 오래된 동네에 살았는데 늦잠 자다가 낮 즈음에 장 보러 밖에 나오면 젊은 사람들은 모두 일터로 나가고 동네에는 노인 분들밖에 없었어요. 2층 사는 할머니는 아파트 화단에서 농사를 짓고 다른 할머니들은 볕 앞에 나란히 앉아 길 고양이한테 밥을 주고 계셨어요. 제가 그런 분들을 매일 볼 수 있는 동네에 살았고 저도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좀 재밌다고 생각해서 제 시선이 자주 멈추게 되니까 자연스럽게 책에도 등장한 것 같아요.”
-'당근 유치원'의 선생님들은 모두 성별 구분이 없어요.
“처음부터 의도한 건 아니었어요. 처음에는 단순히 ‘씩씩한 선생님을 그려야지!’ 생각하고 치마 입은 곰 선생님을 그렸어요. 근데 그리다 보니 애들이랑 노는데 선생님이 치마를 입으면 불편할 것 같아서 바지로 고쳤어요. 그래서 곰 선생님은 중성이 되었고 담당 편집자님이 남자 유치원 선생님도 있다고 하셔서 다른 선생님들도 모두 성별이 구분되지 않게 그리게 됐어요.”
-고정관념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하는 노력이 있다면요.
“저도 그런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한 평범한 사람이고, 특별히 뭔가를 의도하지 않고 생각나는 대로 그리는 편이어서 책이 나오고 난 다음에야 ‘아차’ 싶은 부분도 있어요. 요새는 그동안 절대 안 읽던 종류의 책도 찾아 읽으며 공부하고 있고요, 편집자님들 이야기도 열심히 듣고 있어요.”
-아동콘텐츠를 만드는 사람들은 어떤 걸 좀 더 신경 써야 할까요.
“우리 스스로 자신이 만든 콘텐츠를 한번 의심해 보는 건 어떨까 해요. 지나고 보니 저도 제가 그린 책들에 아쉬운 부분들이 있거든요. 한번 더 생각했다면 그렇게 그리지 않았을 텐데 싶은 것들요. 우리는 모두 편견이나 고정관념이 없지 않은 사람들이니까 우리가 만든 것들 역시 그런 것들을 담고 있지는 않나 하고 한번 더 검토하면 더 나은 콘텐츠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아요. 그걸 보고 자란 다음 세대는 우리보다 편견과 고정관념이 적은 사람으로 자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아 갑자기 어깨가 무거워지네요.”
2006년 첫 동화책 '짜장면 불어요!'로 등단, 2015년 출간한 작고 연약한 암사자 이야기 '푸른 사자 와니니'로 큰 사랑을 받고 있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사자를 대하는 마음이 절대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다.
-어린 암사자를 주인공으로 한 계기가 있나요.
“등단 후 작품을 두세 권 내면서 불균형한 것들이 보였어요. 2015년에 작정하고 어린이도서연구회 추천도서 목록을 조사해봤는데, 작가는 90%가 여성인데 장편 동화 주인공은 상당수가 남자 어린이였어요. 여자 어린이는 주인공 3인방 중 한 명이거나, 혼자 주인공인 경우에는 '몽실언니'처럼 희생하거나 수동적인 캐릭터였어요. 이런 조사를 하면서 여자 어린이를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여성 인물을 전반적으로 새롭게 그려내야 한다는 의지를 갖게 됐던 것 같아요.”
-초기 작품부터 강조한 ‘자기답게 살아가는 것’이 결국 다양성과 닿아있는 것 같아요.
“다양성은 인간이 가진 가장 아름다운 가치가 아닐까 싶어요. 그런데 어린이는 제한된 환경에서 생활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다양성을 경험하기 어려워요. 특히 요즘 아이들은 부유한 지역과 그렇지 않은 지역이 분리된 채 생활하기 때문에 편견이 강화되는 것 같기도 해요. 그래서 지금은 어린이 문학에서 다양성을 얘기하는 것이 더더욱 중요해요.”
-다양성을 반영하기 위한 방법이 있다면요.
“어떤 방법이라기보다는 제가 그런 눈을 가지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저 역시 다양성을 고민하고 추구하고 있지만 많은 것들을 놓치고 살고 있어요. 제가 자신이 없는 부분은 의논을 해요. 추리 동화 '연동동의 비밀'에서 주인공과 함께 사건을 해결하는 친구 중 한 명이 휠체어를 타요. 고민해서 썼지만 대상화하는 것일 수도 있어서 특수학교 교사인 동료 작가에게 봐달라고 했어요. 그 작가가 ‘시선은 문제없지만 요즘은 그런 휠체어를 안 탄다’고 알려줘서 수정했어요. 확신이 없는 것은 겁이 나서 다루지 않기도 해요. 타자화될 가능성이 굉장히 많으니까 신중하게 접근하려 하고, 다뤘을 때는 두세 번 살피는 과정도 필요해요.”
-차별을 담은 어린이 콘텐츠도 많아요.
“남녀 비중부터 비(非)가시화되는 존재, 왜곡돼 있는 존재가 많아요. ‘애들이니까 이 정도만 얘기하면 될 거야’라는 가벼운 태도는 좋지 않은 것 같아요. 한발 앞서가야 하는데 게으른 거죠. 문학은 이 사람의 진심을 저 사람(독자)에게 전하는 일인 것 같아요. 정말로 이 진심에 다가간다면 사회적인 편견과 선입견만으로 단순하게 그 인물을 그릴 수 있을까요. 어린이 문학은 어린이들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더 잘 전하기 위해서 더 깊이 가봐야 해요.”
2017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동화 부문으로 등단, 2019년 제1회 나다움어린이책 창작 공모전에서 '비밀 소원'으로 대상을 수상했다. 이 책에는 어른이 본받고 싶은 어른이 많다.
-'비밀소원'에는 할머니, 이모, 아이 3인 가족과 이혼 가정 등이 나와요.
“제가 어릴 땐 교과서에 2가지 종류의 가족이 있었어요. 대가족과 핵가족. 지난해 교과서를 봤는데 여전히 핵가족, 대가족이어서 깜짝 놀랐어요. 아이들한테는 가족이 세상의 거의 전부인데, 분류되지 않은 형태에 있는 아이들은 쓸데없는 소외감을 느끼고 스스로에 대한 의구심이 들 것 같았어요. 책이 현재 이런 상황에 처한 아이들에게 도움이 될지 확신은 못하겠어요. 하지만 이야기 속 아이들이 주변의 좋은 사람들로 인해 이겨낸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여성 경찰관과 방송사 여성PD가 등장해요.
“자연스럽게 어필하고 싶었어요. 경찰관은 글에는 여성이라는 표현이 없었지만 화가에게 경찰 2명을 한 명은 젊은 여성, 다른 한 명은 좀 더 나이든 여성으로 그려달라고 부탁드렸어요. PD는 육아휴직 후 복직한 여성이에요. 아이의 거짓말을 혼내기보다 재치있게 넘어가주는 좋은 어른으로 설정했어요. 강의에서 만난 아이들이 ‘PD가 좋았다’는 얘길 많이 하더라고요.”
-주인공의 할머니는 헌법을 공부해요.
“할머니가 PD만큼 인기가 많아요. 어린이 콘텐츠 속 할머니는 몸뻬바지 입고 글씨 못 읽고 막무가내인 캐릭터로 주로 그려져요. 할아버지는 안 그런데 유독 할머니만 그런 게 싫었어요. 그래서 세상을 좀 더 현명하게 살고 싶어서 공부를 하는 할머니로 설정했어요. 그런데 어른과 아이들의 반응이 달라요. 어른들은 ‘할머니 너무 과한 거 아니야?’라고 하고, 아이들은 그런 거부감이 전혀 없어요.”
-다양성을 반영하기 위해 노력하는 부분이 있다면요.
“제 생각과 가치관을 아이들에게 억압적으로 넣어주고 싶진 않아요. 작품에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으려면 제 자신이 계속 단련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좋은 사람이 되고, 좋은 것을 추구하고, 사회현상을 편안하게 받아들이지 않아야 할 것 같아요. 사실 '비밀 소원' 출간 후 일주일 동안 잠을 못 잤어요. 단어나 인식 같은 게 잘못 들어가진 않았을까 너무 무서워서요.”
-신간 '아홉살 하다' 주인공도 여자 아이예요.
“어떤 분들이 ‘여자 주인공은 여자애들만 읽지만 남자 주인공은 남녀 다 읽는다’는 얘기를 해주기도 했어요. 저는 여자가 주인공인 작품을 아주 재미있게 써서 둘 다 재미있게 읽을 수 있게 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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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별 고정관념과 편견에 빠지다
<2> 모욕을 주는 성교육
<3> 재미로 포장된 외모비하
<4> 차별 없는 아동콘텐츠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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