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용 외교장관은 최근 관훈클럽 초청 토론회에서 외교관으로서는 지나친 것 아닌가 싶을 정도로 일본을 공개 비난했다. 그는 과거 군대위안부 협상과정을 설명하면서 “매우 현실적인 대안을 마련했으나, 일본이 일관되게 자기들 주장만 반복했다”고 했다. 또 “정부 간 합의를 지키지 않으면 한국이 국제법을 위반하는 것이라는 어불성설 같은 주장으로 우리 정부를 매도하고 있다”며 “과연 일본이 그럴 자격이 있는 것인가”라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정 장관의 행태는 마치 친구와 다툰 어린이가 “저 녀석이 먼저 잘못했어. 말이 안 통하는 놈이야”라고 고자질하며 부모에게 응석을 부리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 정도다. 그러나 오죽 답답하면 저럴까 싶다가도, 이런 식으론 한일갈등을 풀어나가기 어렵겠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왜냐? 외교관이라면 상대국의 부당성을 논박하더라도 ‘너희가 그럴 자격이 있냐’는 식으로 막연한 감정을 표출하거나, 그걸 자국민 앞에서 웅변함으로써 스스로 협상 여지를 없애는 짓은 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경색된 한일관계는 정 장관 취임 3개월이 눈앞인 지금도 전혀 풀릴 기미조차 안 보인다. 당장 정 장관은 4일부터 영국 런던에서 열리는 주요 7개국(G7) 외교ㆍ개발장관회의 참석차 출국하는 순간까지 함께 회의에 참석할 모테기 도시미쓰 일본 외무상과의 양자회담 일정은커녕 전화통화조차 못한 답답한 처지에 빠져 있는 게 현실이다.
한일관계가 유례없이 나빠진 데는 아베 전 정권을 전후한 일본의 우경화가 적잖이 작용했다. 그전까지 일본은 대외적으로는 과거사에 대해 반성한다는 입장을 표명해왔다. 그게 아베 정부부터 ‘더 이상 사과 못하겠다’는 식으로 반전하면서 주변국들의 반감을 자극했다. 하지만 그에 대한 우리의 외교 대응 또한 매끄럽지 못했던 게 사실이다. 특히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해 일본 측이 ‘위로금’을 배상해야 한다는 우리 대법원의 2018년 판결 이래 현 정부의 대응은 아쉬운 대목이 많았다고 본다.
문재인 대통령은 판결에 대해 “정부는 사법부의 판결을 존중해야 한다”는 교과서적 입장을 천명했다. 그리고 정부는 징용 배상이든 위안부 배상문제든, 지금까지 그런 원칙적 입장, 즉 일본에 배상책임이 있다는 판결에 입각해 일본과 협상을 모색해왔다. 그러니 판결 자체가 한일기본조약(청구권협정)을 어긴 국제법 위반이며, 국제법상 주권국가는 다른 나라의 재판권에 복종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내세우는 일본 측과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었다.
이런 가운데 지난달 21일 나온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15부(재판장 민성철)의 일본 정부 상대 군대위안부 피해자 손해배상소송에 대한 각하 결정은 상황을 타개할 현명한 통찰을 제시했다고 본다. 이번 판결이 일본 측 배상 책임을 인정한 이전 판결과 다른 점은 ‘국내 법원이 국외 국가에 대한 소송의 재판권을 갖지 않는다’는 ‘국가면제’에 관한 국제관습법을 인정한 대목이다. 재판부는 “법원 판결이 국제관습법과 달리 일본 정부의 국가면제를 부정하게 되면, 일본과의 외교충돌이 불가피해 국익에 잠재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점도 분명히 했다.
국내 일각의 비판을 무릅쓴 이번 판결은 외교현실을 감안한 합리적 논리를 제시함으로써 정부에도 문제해결의 돌파구를 열어준 것으로 평가된다. 이미 일본에 연연하지 말고 우리 정부가 정치력을 발휘해 사회적 기금을 조성하고, 일본 대신 배상하자는 남기정 서울대 일본연구소 교수나 문희상 전 국회의장의 해법도 나온 상태다. 지금은 정권의 체면을 생각하며 일을 회피할 때가 아니다. 문 대통령이 임기 내에 한일관계 정상화의 물꼬를 튼다는 각오로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잘라주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