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호남 민심..."민주당에 실망" "그래도 밀어줘야"

입력
2021.05.03 17:00
24면

편집자주

‘송용창의 정치행간’은 의회와 정당, 청와대 등에서 현안으로 떠오른 이슈를 분석하는 코너입니다. 정치적 갈등과 타협, 새로운 현상 뒤에 숨은 의미와 맥락을 훑으며 행간 채우기를 시도합니다.

“이낙연이가 그 사면하자고 해 갖고 여론이 안 좋아져 버렸제. 그래도 이낙연이지라” “아, 형은 뭘 알도 못 하고. 이낙연이는 되도 안 해”

지난달 28일 광주시 서구 양동 시장 인근. 60~70대 어르신 대여섯 명이 모인 곳에 끼어서 내년 호남의 대선 민심을 묻자 한바탕 언쟁이 벌어졌다. 70대의 김모씨는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가 지지율이 떨어지긴 했어도 결국엔 광주 시민들이 그를 밀 것이라고 하자 60대의 최모씨는 이 전 대표로는 대선에서 못 이긴다고 타박을 놓았다. 이들의 언쟁은 이재명 경기 지사를 두고 이어졌다. “(이 지사가) 문재인 정부에 반대되는 소리나 해서 보수세력이 좋다고 하제”라는 김씨의 불만에 다른 사람들도 거들자, 최씨는 “글면 (이 지사 외에) 대안이 어디 있소”라며 답답한 듯 큰소리를 쳤다.

광주 시민들의 민심은 이렇듯 지금 어지럽다. 문재인 정부를 창출했다는 지역적 자부심은 상처받은 지 오래다. 차기 주자로 밀었던 이낙연 전 대표의 지지율마저 뚝 떨어져 대권 가능성은 희미해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마음에 쏙 드는 대안도 없는 상태다. 대선 때마다 전략적 몰아주기 선택으로 대선 판도에 막강한 영향을 미쳤던 호남 민심은 아직 본심을 드러내지 않은 채 잠행 중인 셈이다.

착잡한 호남인들 “이낙연, 정세균 대통령감이긴 하지만...”

실제 여론조사에서도 호남의 대선 민심은 뚜렷한 방향을 잡지 못하는 모습이다. 지난달 29일 발표된 4개 여론조사 기관의 전국지표조사(NBS)에 따르면, 광주·전라 지역에서 이재명 지사가 30%, 이낙연 전 대표가 17%, 정세균 전 총리가 12%,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7%의 지지율을 보였다. 한 달 전 NBS 조사에서 이 지사 33%, 이 전 대표 26%, 윤 전 총장 7%였던 데서 정 전 총리까지 가세한 것이다. 대선 출마 선언을 앞두고 있는 정 전 총리는 27일부터 호남 일대를 누비며 텃밭 다지기에 나섰다. 이 전 대표의 지지율이 떨어지는 빈자리를 같은 호남 출신인 정 전 총리가 비집고 들어가 호남 대표주자 자리를 두고 각축을 벌이는 셈이다.

하지만 이 전 대표나 정 전 총리를 대하는 광주 시민들의 반응은 착잡하다. 양동 시장에서 홍어판매업을 하는 김창규(59)씨는 “두 분 다 경륜도 있고 인품도 있고 대통령감이긴 하다"면서도 “하지만 호남 사람이 대선 주자로 나가면 야당한테 필패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여기 사람들은 ‘될 사람을 밀어주자’는 정서가 있다”며 “주변 상인들을 보면 이제 이재명 지사 쪽으로 기운 것 같다”고 말했다.

이번에도 전략적 선택? “이재명으로 기울 것”

민심의 바로미터 격이라는 택시 기사들의 반응도 엇비슷했다. 광주역 앞에서 대기 중인 택시 기사들에게 대선 민심을 묻자 돌아온 답은 “지금 나오는 여론조사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이었다. 한 기사는 “지금은 다들 무관심한 편이다”라며 “선거가 임박하면 결국은 ‘당선 가능성’을 기준으로 민심이 하나로 모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는 이른바 ‘전략적 선택’이라 불리는 호남 특유의 민심으로 지역 출신 상관없이 당선 가능성을 보고 몰아주는 것이다. 호남이 2002년 '노무현 열풍'을 일으킨 것이나 문재인 대통령을 압도적으로 지지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호남 출신으로는 단독으로 대권 도전이 어려운 상황에서 정권 창출을 위해 나온, 어쩌면 불가피한 선택일지 모른다.

이를 감안하면 이재명 지사가 대선 레이스 막판까지 현 지지세를 유지하면 호남 민심은 결국 이 지사로 쏠리게 된다는 얘기다. 호남 지역 이 지사 지지모임인 희망사다리의 박용수 상임대표는 “호남분들은 민주정부 재창출을 위해서 동네 대표가 아니라 전국에서 골고루 지지를 받을 수 있는 국가대표를 원한다”며 “재·보선 패배에도 불구하고 이 지사 지지율은 안정적인 모습을 보이는데, 호남도 이를 보면서 이 지사 쪽으로 확실한 방향을 잡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윤석열 반짝 1위?... 민심 이반 징후

이런 기류 속에서도 지난달 16일 조사된 리얼미터 여론조사에선 이상 현상도 벌어졌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호남에서 26.7%의 지지율을 얻어 이 지사(24.5%)와 이 전 대표(11.5%)를 모두 제친 것이다. 가상 양자 대결에서도 윤 전 총장이 이 지사와 이 전 대표를 앞선 것으로 조사됐다.

반문(反文) 대표 주자인 윤 전 총장이 민주당의 안방인 호남에서마저 기선을 잡았다는 뜻일까. 지역 정가에선 이 지지율이 다른 조사와 큰 차이가 나기 때문에 표본이 적은 데서 발생한 일시적인 오차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실제 중·장년층 시민들은 “윤석열을 찍는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애기다” “무슨 뚱단지 같은 소리냐”는 반응이었다. 다만 한 택시기사는 “예전에는 손님들이 윤석열 욕을 엄청 했는데, 요즘은 그렇게 욕하는 상황은 아니다”라며 “이전과 달리 민주당 욕을 하는 사람들은 꽤 늘었다”고 말했다.

둘쭉날쭉한 여론조사는 민주당에 대한 민심 이반과 맞물린 현상으로 봐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국민의힘 광주시당 관계자는 “지역 정서상 윤 전 총장 지지세가 자리를 잡았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공개적으로 말하기 어려운 심정이 여론조사에서 일부 드러난 것일 수 있다”며 “주민들 사이에서 집권 여당에 대한 불만과 변화에 대한 갈망이 그만큼 커지고 있다는 신호다”라고 말했다.

부글거리는 2030세대 "투표 안 할 것"

지난달 30일 공개된 한국갤럽 조사에서 문재인 대통령 지지율은 취임 후 최저치인 29%를 기록하며 30%마저 무너졌다. 전 세대에서 부정 평가가 긍정 평가를 앞섰고 지역별로도 호남만 빼면 부정이 긍정을 압도했다. 이렇듯 문재인 정부를 지탱하는 마지막 버팀목은 호남이다.

하지만 문 대통령에 대한 70~80%의 지지율도 이젠 50%대로 주저앉았다. 절반의 민심은 여권에 대한 불만으로 부글거리지만 그렇다고 대안을 찾지도 못하는 판이다. 그 속앓이가 가장 격렬한 쪽이 2030세대다. 양동 시장에서 만난 30대의 한 종업원은 “정치에 관심이 없다. 지난 대선에서 문재인 대통령에게 투표했지만 나아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며 “다음 선거에는 투표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잘라 말했다. 아예 체념했다는 얘기다. 광주에서 증권회사에 다니는 김모(37)씨는 민주당 권리당원이라면서도 “현 정부가 부동산 정책 등에서 젊은 세대의 사다리를 끊어버리는 잘못된 일을 너무 많이 저질렀다”며 “다음 대선에서 민주당이 정권을 잡으면 안 된다”고 직설적으로 불만을 드러냈다. 그는 “그렇다고 야당 후보는 도저히 찍을 수 없기 때문에 투표장에 나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4·7 재·보선에서 집권 여당을 심판한 서울과 부산의 20대 반란을 지켜본 이후성(26)씨는 “20대 표심을 이해한다”고 말했다. 부동산 폭등, 불공정, 내로남불 등의 행태에 실망해 현 정부에 등을 돌린 2030세대의 정서가 호남이라고 다르지 않은 것이다. 다만 이씨 역시 “민주당이 아무리 싫어도 국민의힘을 지지할 수는 없다”면서 “이 지사를 지지할 생각인데, 친구 중에 윤 전 총장을 찍겠다는 애들도 있긴 있다”고 말했다. 현 정부에 불만은 가득하지만 차마 국민의힘은 찍을 수 없는 게 호남 청년들의 고민인 셈이다. 이는 청년들의 정치 무관심과 투표 포기로 이어질 수 있는 대목이다. 호남이 과거처럼 전략적 선택으로 특정 후보를 몰아 준다고 하더라도 그 에너지는 이전과 달리 미약할 수 있다는 뜻이다. 호남 청년들이 아직은 야당을 찍을 수 없다고 하지만, 민심 이반이 계속된다면 그 마지노선마저 무너질지 모른다.

송용창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