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항모가 오는 까닭

입력
2021.05.02 18:00
26면

편집자주

<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제주도와 전남 여수 사이에 자리한 거문도는 섬 3개가 동그랗게 둘러싸고 있어 정박하기 좋은 천혜의 해상 요충지다. 1885년 4월 영국 군함들이 이곳을 불법 점령했다. 당시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국은 러시아의 팽창을 막는 게 지상 과제였다. 부동항을 찾던 러시아가 조선과 수호통상조약(1884년)을 맺고 남하 정책을 본격화하자 그레이트게임 차원에서 거문도를 선점한 것이다.

□ 1904년 러일전쟁 배경에도 영국이 있었다. 일본은 청일전쟁(1894년)에서 이긴 뒤 요동반도 등을 얻었으나 러시아를 필두로 한 3국 간섭으로 다시 요동반도를 반환하게 되자 이를 간다. 러시아의 아시아 영향력 확대를 우려하던 영국도 직접 싸우기보다는 일본을 앞세워 견제하는 게 더 낫다고 판단했다. 이렇게 체결된 게 영일동맹(1902년)이다. 일본은 영국에서 국채를 발행해 전비를 조달하고 영국산 군함으로 무장해 러시아에 승리할 수 있었다.

□ 영국이 31억 파운드(약 4조8,000억 원)를 들여 건조한 280m 길이의 최신예 항공모함 ‘퀸 엘리자베스’가 하반기 부산에 온다. F-35B 8기, 함정 6척, 잠수함 1척, 헬기 14대, 해병대 1개 중대도 동행한다. 일본, 인도, 싱가포르 등도 순방한다. 미국, 일본 등과 서태평양 및 남중국해에서 연합군사훈련을 하는 게 가장 주목된다. 중국을 포위·압박하기 위한 미영일의 군사 시위인 셈이다. 100여 년 전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한다며 일본과 손잡은 영국이 이번엔 중국의 팽창을 막겠다며 미일 연대에 동참하는 모양새다. 제2의 영일동맹이란 주장도 나온다.

□ 거문고 사건 당시 고종은 신성한 국토가 유린됐는데도 한 달 뒤 영국의 통보를 받은 뒤에야 항의했다. 반면 일본은 국제회의에서 영국의 거문도 점령 가능성을 사전 폭로하는 정보력을 자랑했다. 지금 우린 그때보다 나은 정보력을 가졌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큰 흐름을 파악한 일본은 미영에 밀착하는 데 비해 우린 어정쩡한 상태로 눈치만 보면서 생뚱맞은 친중 행보만 이어가고 있다. 국제 정세에 어두워 러시아가 가장 센 줄 알고 어이없는 아관파천을 감행한 고종의 어리석음이 되풀이되지 않길 바랄 뿐이다.

박일근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