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모욕을 주는 성교육
초등학생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성교육 만화 '내 몸이 궁금해'의 한 장면이다. 성범죄의 원인을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에게 돌리는 사실상 '2차 가해'의 레퍼토리가 그대로 담겨있다.
2차 가해의 토대가 되는, 잘못된 통념에 근거한 질문을 받은 초등학생들은 각기 남성, 여성으로 나뉘어 입씨름을 벌인다.
이런 성교육의 교훈은 뭘까. 성폭력을 피해자 탓으로 돌리도록 주입하고, 옷차림을 통한 자기 표현 방식을 '인정 받기 위한 과시'로 폄하하며, 여기에 더해 구시대적인 남성의 '성적 충동론'을 내걸고 있다.
대사뿐만 아니라 그림 또한 초등학생 남아를 침을 질질 흘리는 '변태'적인 남성으로, 여아는 얄미운 인상을 강조했다. 전반적으로 아이들을 무척 저질로 묘사했다.
이 책은 2012년 만들어졌지만, 인터넷 서점 등에서 여전히 구입할 수 있다. 서울과 경기는 물론이고 세종, 부산 등 전국의 공공 도서관에서도 열람이 가능하다.
한국일보가 살펴본 성교육 도서(총 30권) 중 무려 10권에서 남자아이가 여자아이의 브래지어 끈을 당기고 도망가는 장면이 등장할 정도로, 아동 성교육 도서의 수준은 심각했다. 사실상 성교육을 빙자한 성폭력 책이라고 할 만한 경우도 있었다.
최연소 가해자가 불과 12세였던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은 아동·청소년 사이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왜곡된 성인식을 원인으로 꼽는다. 한국일보가 살펴본 아동용 책, 영상 등에서 그 원인을 어느 정도 찾아볼 수 있었다. 이런 콘텐츠를 제재할 아무런 제도가 없는 것도 큰 문제점이다.
"남자들이 생리적으로 여자들에 비해 충동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유념! 노출이 심한 옷차림은 되도록 삼가고 밤늦게 혼자 다니지 않으며, 부득이하게 다녀야 할 경우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환하고 밝은 길로 걷는다." (너는 알고 있니? 사춘기의 비밀)
치한을 만나지 않기 위한 방법이라면서 어린이 대상 성교육 도서에 소개된 내용이다. 성범죄 책임을 피해자에게 돌리는 데다가 '하지 말라'가 아니라 '당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소극적인 저항 교육이다.
다수 어린이 콘텐츠에서는 피해자가 될 가능성이 높은 여자아이를 훈계한다. 반면 남성에게는 '성에 대한 충동' '호기심'이라는 명제 아래 면죄부를 적극적으로 부여한다. '내 몸은 소중해'에서는 이성의 몸을 훔쳐보는 일을 멈추기 어려워하는 남성의 모습을 그리면서 "남자들이란 정말 못 말려"라고 덧붙인다. 이런 범죄성 행위가 개인이 아닌 성별 자체에 있다는 서술이다.
성에 대해 말하는 일이 남성에겐 허용되고, 여성에겐 금기인 것처럼 묘사되기도 한다. 남자아이는 성인 잡지나 영상을 보고 이성을 좋아한다고 공공연하게 떠벌리는 등 끊임없이 좌충우돌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여자아이는 이를 보고 얼굴을 붉히거나 불쾌해하는 역할로만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일례로 남자친구를 사귀게 돼 신이 난 여동생에게 오빠는 이렇게 주의를 준다. "여자애가 조신한 맛이 있어야지. 그래서 남자친구가 없는 거야. 자고로 여자는 조신해야지, 떽!"(내 몸은 소중해) 등장인물 그 누구도 이 발언이 틀린 것이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이런 성교육 책에서 2차 성징 과정을 설명하는 방식은 '조롱'과 '모욕'이다.
'위기탈출 핑크 수호대' '내 몸이 이상해' 등에서는 여성의 브래지어 끈을 당기는 장면이 나온다. 아직 브래지어를 착용하지 않거나 가슴이 크지 않은 여자아이를 두고 "얜 아직 안 했다. 절벽이래요, 절벽이래요"라며 놀린다.
또 성기가 발달하지 않은 남자아이를 '3밀리미터' '배꼽이 두 개인 줄 알았다'라고 조롱하거나, 포경 수술을 마친 성기를 '번데기'라고 부르기도 한다. (내 몸이 이상해, 내 몸이 궁금해 등)
선생님이나 부모님은 조롱을 받고 속상해하는 자녀에게 "남자애들은 놀리고 싶은 마음과 좋아하는 감정을 착각한다"라고 가해를 옹호하며 마무리하곤 했다. (루나레나의 비밀편지 등)
"쳇! 비웃으려면 마음대로 비웃어! 난 신경 안 쓰니까. 열심히 해서 세기가 좋아하는 가슴 큰 여자가 될 거야."
'12살 사춘기 소녀' 다솜이는 좋아하는 같은 반 남자친구 세기가 수업 중에 가슴이 큰 여성이 등장하는 성인 잡지를 본 사실을 알게 된다. 집으로 돌아온 다솜은 인터넷에서 본 가슴이 빨리 커지는 체조를 하면서 이렇게 중얼거린다. 성교육 책 '궁금한 성 아름다운 성'에 나오는 내용이다.
성교육 콘텐츠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신체적 차별을 당연시하고 부추긴다. 가슴이 큰 캐릭터가 다른 친구들을 향해 "가슴도 작은 것들이 잘난 척하기는. 적어도 이 정도는 돼야쥐"(내 몸이 이상해)라고 하고, 가슴이 커지는 2차 성징을 설명해주는 엄마의 가슴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딸이 "엄마처럼 되면 곤란한데…"(Why 사춘기와 성)라고 말하는 장면도 나온다.
'예뻐지고 건강해지는 사춘기 소녀 몸 가꾸기'라는 책에서는 "여름처럼 노출이 많아지는 계절에는 제모가 필수"라면서 "아무리 얼굴이 예뻐도 팔을 들었을 때 겨드랑이 털이 무성하게 보인다면 완전 꽝"이라고 돼 있다.
이런 이미지들은 여아들에게 스스로 신체를 단속하고 비하하도록 만든다. 도서 '대중문화는 어떻게 여성을 만들어내는가'의 저자 멀리사 에임스와 세라 버콘은 "소녀들은 미디어를 통해 유포되는 이미지에 따라 미의 기준에 맞추어야 한다는 압박을 매우 심각하게 느끼게 된다"라고 지적했다
성교육 책이 아니라도 아동이 보는 책은 성관념 묘사에 책임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오히려 끔찍한 성범죄를 보여준다.
2019년 아동용 도서인 '태경TV 학교탈출'이 이별 통보를 한 여자친구에게 염산을 뿌린 사건을 괴담 중 하나로 소개했다. '무척 도도하고 건방진' 여성이 이별을 통보하자, 복수심에 불탄 남성이 주변을 맴돌다 염산을 뿌렸다면서 사건의 빌미를 여성이 줬다는 묘사가 담겼다.
또 "여자는 겨우 목숨은 건졌지만 얼굴이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흉측하게 변해버렸다"는 대사와 함께 녹아내린 얼굴을 그리기도 했다. 이 책은 논란이 된 다음에야 회수됐다.
국내 유명 애니메이션은 불법촬영을 소재로 했다가 해당 에피소드를 내보낸 방송 채널이 지난해 방송통신심의위원회로부터 행정 지도(권고)를 받았다. 방심위에 따르면 남학생이 초등학생 주인공의 용변보는 모습을 카메라로 찍자, 주인공은 부끄러운 사진이 공개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숙제를 대신해주고, 교실·화장실 청소까지 맡는다.
이 에피소드는 현재 삭제되어 한국일보가 내용을 확인하기는 어려웠고, 제작사는 기자에게 "명예훼손으로 인한 경제적, 정신적 피해가 있을 수 있다"며 "보도하지 말라"고 불쾌감을 표시했다.
어린이 콘텐츠 제작사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이런 내용을 만드는 걸까.
한 국내 애니메이션 제작사 측은 "사전 검열은 창작자에게 치명적이고 그러면 점점 재미가 없어질 수밖에 없다"라며 "모든 애니메이션을 교육 애니메이션으로 만들 수는 없다"고 항변했다. 또 다른 출판사 역시 "교육 목적을 가진 책이지만 만화이기에 재미를 위한 표현이 들어간 것 같다"라고 밝혔다. '재미있게' 만들려면 어쩔 수 없다는 취지다.
현재 간행물윤리위원회는 만화 또는 동화로 제작된 아동청소년 성교육 관련 도서를 별도로 심의하지 않는다. 지난 20대 국회에서 강창일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성교육 관련 간행물의 경우 유해성을 심의하는 출판문화산업 진흥법 및 청소년보호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발의했으나 임기만료로 폐기됐다.
이런 책들은 일부 절판된 경우도 국립이나 구립도서관 등에 여전히 비치돼 있고, 심지어 도서관에서 전자책으로도 빌려 볼 수 있다.
서울 은평구에서 두 아이를 키우는 강윤아(36)씨는 "도서관에 있는 책은 한번 걸러진 책이라고 생각했는데, 아이가 읽는 책을 봤다가 현실과 동떨어진 성교육에 놀랐다"라고 전했다.
성교육뿐 아니라 아동 콘텐츠 전반에 최소한의 제어장치도 없다. 정부도 문제점은 알고 있다. 2014년 문화체육관광부의 모니터링 결과에 따르면, 아동‧유아 도서 34권, 영상콘텐츠 40건, 웹툰 38건, 앱 16건 등 총 128건에서 성평등 인식을 저해하는 요소가 1,008건(88.3%)으로 성평등 인식을 향상시키는 요소(133건, 11.7%)보다 압도적으로 많았다.
문체부는 ‘양성평등 관점에서의 영유아・아동용 문화콘텐츠 생산 가이드라인’을 제작해 배포할 계획이라고 밝혔으나 지켜지지 않았다.
외국은 아동 콘텐츠를 정부 차원에서 규제하고 있다. 2019년 성평등 그림책 구독 서비스인 ‘우따따’를 시작한 유지은 딱따구리 대표는 “국내에는 성평등 도서 제작에 대한 가이드라인이 없어서 독일 스웨덴 영국 등 다른 나라 교육청의 가이드라인과 논문을 참고해 좋은 책을 고르는 기준을 만들었다”며 “미국은 민간 출판사가 그림책을 만들 때도 다양한 인종과 종교인을 반드시 일정 비율 이상 넣도록 하고 있지만 국내에는 그런 기준도 없다”고 말했다.
심재웅 숙명여대 미디어학부 교수는 “아동 콘텐츠 제작자들이 성 고정관념뿐 아니라 다문화, 소수자 등 다양한 영역에 대한 감수성이 없다”며 “제작 후 전문가가 검토하거나, 부모가 사전 시연을 본 후 방영하도록 하는 등 제도적으로 보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는 “출판물 등 아동 콘텐츠가 사회 변화를 못 쫓아가는 문화지체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며 “작가와 편집자 둘 다 훈련을 많이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글 싣는 순서> 뒤로 가는 아동콘텐츠
<1> 성별 고정관념과 편견에 빠지다
<2> 모욕을 주는 성교육
<3> 재미로 포장된 외모비하
<4> 차별 없는 아동콘텐츠를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