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culture)는 인간이 사회 구성원으로서 획득한 능력 및 습관의 총체라고 정의되기도 하는데, 이는 의사소통을 통해 공유되고 전달되기 때문에 문화와 언어는 불가분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언어는 그 자체로 독특한 문화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그러니 언어권에 따라 다른 문화가 나타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다.
농인(聾人, deaf mutism)은 병리학적 관점으로는 청력에 결함이 있는 사람들이지만, 언어 문화적 관점으로 보면 음성언어가 아닌 수화언어(수어, 手語)를 제1언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이다. 그렇기에 이들만의 '농(聾)문화'가 존재한다. 수어를 사용하는 사람들끼리 집단을 이루고 지속적으로 교류하며 소속감을 갖기도 하고, 농인으로서 자기동일성(농정체성)을 가지며 이 안에서 자연스럽게 활성화되고 전승되는 생활양식의 총칭인 농문화를 형성하며 누리고 산다. 실제로 농인들은 농인들만의 특별한 문화가 있다고 생각하며, 농인사회는 청인(聽人, 청력 소실이 없는 사람)이 외국에 이민을 가서 한국인끼리 모여 사는 것과 같다고 여긴다. 또한 수어는 농인들끼리의 깊은 생각을 공유하고 자신들의 의견을 표시하는 데 문제가 없는 독자적 언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런 독특한 농문화를 인정하지 못하는 청인의 세계는 의사소통에 있어 소리가 우월하다고 여긴다. 과거 농인교육에서도 수어보다는 구화나 독순(讀脣, 입술의 움직임을 읽는 법)을 가르치는 데 집중하기도 했다. 가족 사이에서도 농인에게 의사소통에 전혀 문제가 없는 수어를 두고 억지로 어색한 구화를 사용하도록 강요하고, 청인 중심의 문화 속에서 벙어리라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구화로 대화할 때는 "정확히 발음해"와 "다시 말해줘"라는 소리를 수도 없이 들었지만, 수어로 교육받고 대화할 때는 더 이상 청각도 발음도 장애가 되지 않는다.
소리의 언어가 유일한 언어는 아니다. 손동작과 몸의 위치, 다양한 표정을 이용해 시각 언어를 사용한다. 9년 전 장애인단체가 한국수어법 제정을 촉구하기 위해 서울 광화문에 있는 세종대왕상 앞에 모여서 '훈농수어(訓聾手語)'를 읽었다. '농인의 언어인 수어가 한글과 달라 서로 통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농인들의 답답함이 크고, 자신의 의견을 원활하게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세종인 내가 농인들을 위하여 수어를 만들어 반포한다.' 이러한 운동의 결과, 2016년 한국수어가 한국어와 구별되는 고유한 자격의 공용어임을 선언하는 법률로 한국수어화언어법이 제정되었다. 이를 통해 한국수어의 교육, 보급, 통역지원 등의 폭이 넓어졌다. 매일 방역 당국의 코로나 상황 발표 시 옆에 수어 통역이 있는 것을 보면 그 변화를 알 수 있다.
청인과 농인 사이 장벽을 허물고, 농문화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는 기회는 많다. 영화 스크린에 말 자막, 해설, 음악표시를 띄우는 배리어프리 영화를 상영하는 ‘가치봄’이라는 프로젝트도 있고, 예술로서의 농문화와 농인의 음악적, 예술적 가능성을 보여주고, 농인과 청인이 함께 즐길 수 있는 뮤지컬 '난파' 공연도 있었다. 농인 부모를 둔 청인 감독들이 농인에 관한 영화를 만들기도 하고, 유투버가 되어 농문화를 알리고 있다. 많은 사람의 노력으로 법이 제정되었고, 또 나처럼 농인의 문화에 익숙하지 않았던 사람에게도 농문화를 알리고 이해도를 높이고 있다. 예전에 벙어리장갑이라고 부르던 것을 '손모아장갑'으로 대체하자고 알린 지 몇 해가 지났다. 장갑을 부르는 단어가 바뀌듯 우리의 생각도 바뀌어야 할 것이다. 농인은 소리의 언어를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손과 표정의 언어를 사용하며 그들만의 문화를 향유하는 사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