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는 누굴 그렇게 기다렸던 걸까

입력
2021.04.29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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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시외버스를 타고 대전에 왔다. 외곽의 임시정류소에서 내려 띄엄띄엄 있는 시내버스를 기다린다. 오가는 이도 없고 서는 차도 없이 공기마저 나른한 오후. 어디선가 턱턱 땅 짚는 소리가 나더니 허리가 잔뜩 굽은 할머니가 등장했다. 기댈 거라곤 대충 깎은 지팡이 하나, 한 걸음 한 걸음 힘들게도 걸어오더니 끄응 신음을 내며 내가 앉은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지팡이를 부여잡은 손은 어찌나 깊고 거친 홈이 파였던지, 수십 년은 방치된 나무벤치보다도 사람이 더 메말라 보였다.

내가 탈 버스는 아직 시점에서 출발도 안 했으니 꽤 기다려야 할 상황, 그 사이 여기 서는 버스 3대가 모두 지나가도 할머니는 미동도 않는다. 한참 후에야 나타난 내 버스에도 할머니는 오르지 않았다. 버스에 타서 창 밖을 보니 홀로 덩그러니 남은 할머니가 자꾸 맘에 걸렸다. 힘겹게 정류장까지 나온 할머니는 무얼 그리 기다리는 걸까.

덜컹거리는 버스에 앉아 할머니와 점점 멀어지면서, 그리스의 남쪽 땅끝마을 수니온곶에 우두커니 서 있던 신전이 떠올랐다. 세계 어디든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되는 곳에는 상당히 복잡한 감정들이 얽혀 있다. 새로운 세상을 찾아 떠나려는 강렬한 호기심과 열정이 있는가 하면, 그렇게 떠난 사람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남겨진 이들의 그리움과 애절함이 있다.

수니온곶도 아테네의 왕 아이게우스가 멀리 떠난 아들 테세우스를 내내 기다린 장소였다. 크레타에서 사람을 잡아먹는 황소머리 괴물을 해치우면, 흰 돛을 달고 돌아오라고 철석같이 다짐도 받았다. 하지만 테세우스는 승리의 기쁨에 도취해서인지 그 약속을 까맣게 잊고는 자기가 죽었다는 뜻인 검은 돛을 단 채 돌아온다. 멀찍이 나타난 배를 애끓는 마음으로 지켜보던 왕은 아들을 잃었다는 슬픔에 수니온곶 절벽 아래로 몸을 던진다. 그래서 수니온곶 앞바다에 붙은 이름이 ‘아이게우스의 바다’, 오늘날 에게해의 어원이다.

처음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땐 성급하지 말라는 교훈이라 생각했다. 성마르게 돛만 보고 결정을 내려 목숨까지 잃었구나 싶었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자식이 죽었다는 소식에 ‘침착’ 따위를 유지할 수 있는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멀리 떠났던 자식이 무사히 내 품으로 돌아오지 못한다는 절망감 앞에서 뭔들 보였을까? 당장 목숨을 버려서라도 더 이상 느끼고 싶지 않을 만큼 숨막히는 고통이 그를 감싸지 않았을까? “에이, 바보 같아. 좀만 기다리지” 하며 휘리릭 읽었던 신화가 20년 후 나에게는 전혀 다른 이야기로 다시 찾아왔다.

7년 전부터 바다만 보면 목구멍이 턱 막히는 것 같은 4월의 마지막 날이다. 그리고 내일이면 고마운 분들 방문계획을 슬슬 잡는 5월이 시작이다. 어쩌면 고맙다는 마음은, 사랑을 쏟아 받는 입장일 때 드는 생각 같다. 내리사랑이라는 말처럼 무조건적인 사랑은 한 방향이지, 양 방향이기가 참 어렵다. 그렇게 부모 품을 떠나가고 잘 돌아보지 않으며 떠난 방향으로만 직진해 제 세상을 개척하는 것이, 자식들에게 새겨진 유전자가 아닌가 쉽다. 자식의 뒷모습만 보고 산다는 부모 또한 자신의 부모에게는 또 그런 자식이었을 테고 말이다. 후회는 항상 뒤늦게 온다. 문득 뒤돌아봤을 때 텅 비어 있는 자리를 만나고 나서야, 큰 사랑을 주던 존재가 사라졌음을 불현듯 알게 된다.



전혜진 여행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