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일가가 고(故)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유산 가운데 1조 원을 감염병 예방과 소아암·희귀질환 어린이 지원을 위해 기부하기로 했다. "인류의 건강과 삶의 질을 높이는 게 기업의 사명"이라고 강조한 이건희 회장의 지론을 받든다는 취지에서다. 13년 전 공언했던 고인의 사재출연 약속도 이뤄지게 됐다.
28일 재계 등에 따르면, 이 회장의 사재출연 여부는 오래전부터 세간의 관심사였다. 이 회장은 2008년 삼성 특검의 비자금 수사 이후 "실명 전환한 차명 재산 중 벌금과 누락된 세금을 납부하고 남은 것을 유익한 일에 쓰겠다"고 약속했다. 이후 약 1조 원으로 추산된 이 돈의 사용처를 두고 다양한 방안이 검토됐지만 2014년 이 회장이 급성심근경색으로 쓰러지면서 후속 절차가 중단됐었다.
이런 상황을 고려한 유족들은 1조 원을 감염병과 소아암·희귀질환 어린이 환자를 위해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우선 코로나19를 비롯해 인류의 최대 위협이 된 감염병 대응에 7,000억 원을 기부한다. 이 중 5,000억 원은 한국 최초의 감염병 전문병원인 '중앙감염병 전문병원' 건립에 쓰인다.
삼성 관계자는 "감염병 전문병원은 첨단 설비를 갖춘 150병상 규모의 세계적 수준으로 지어질 계획"이라고 말했다. 2,000억 원은 질병관리청 산하 국립감염병연구소의 최첨단 연구소 건축과 감염병 백신 및 치료제 개발을 위한 제반 연구 지원에 사용될 예정이다.
유족들은 또 소아암과 희귀질환 어린이 지원에 3,000억 원을 기부한다. 유족들은 "앞으로 10년간 소아암, 희귀질환 어린이 중 가정형편이 어려운 환아를 대상으로 유전자 검사와 항암치료 등 비용을 지원할 것"이라고 말했다.
구체적으로 백혈병·림프종 등 13종류의 소아암 환아 지원에 1,500억 원, 크론병 등 14종류의 희귀질환 환아를 위해 600억 원이 쓰일 계획이다. 삼성 관계자는 "향후 10년 동안 소아암 환아 1만2,000여 명, 희귀질환 환아 5,000여 명 등 총 1만7,000여 명이 도움을 받게 될 것으로 추정된다"고 전했다. 이 밖에도 소아암, 희귀질환 임상연구와 치료제 연구를 위한 인프라 구축에도 900억 원이 투입된다.
원활한 사회공헌에 필요한 위원회도 구성된다. 서울대어린이병원이 주관기관으로 선정될 이 위원회엔 외부 의료진도 참여한다. 이 위원회에선 전국의 모든 어린이 환자들이 각 지역에 위치한 병원에서 편하게 검사와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전국 어린이병원의 사업 참여를 유도할 계획이다.
아울러 유족들은 이른바 이건희 컬렉션으로 불리는 이 회장이 소장한 개인 미술품 2만3,000여 점도 미술관과 박물관에 기증하기로 했다. 여기엔 정선의 ‘인왕제색도’ 등 국보 14건과 박수근 김환기와 모네, 호안 미로 등 국내외 작가의 수작들이 대거 포함됐다.
이 회장 일가의 대규모 사재출연은 처음이 아니다. 이 회장은 2006년 에버랜드 전환사채(CB) 증여 문제와 안기부 'X-파일' 정치자금 제공 의혹 등 논란에 사과하며 총 8,000억 원 상당을 조건 없이 사회에 헌납한 바 있다.
이 사회환원기금을 바탕으로 2006년 교육 소외계층 아동·청소년을 지원하는 '삼성고른기회장학재단'이 출범했고, 2010년 '삼성꿈장학재단'으로 이름을 바꿔 현재까지 운영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