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의사가 교과서대로만, 배운대로만 치료하는 건 아니다. 다들 습관이나 강박 같은 것이 있다. 나도 그렇다. 그건 도저히 잊을 수 없는 한 환자의 경험에서 시작됐다
그 환자를 만난 건 레지던트 1년 차 때였다. 모교 병원에서 인턴을 마치고 ‘빅5’라고 불리는 대형병원으로 온 지 얼마 안 된 시기였다. 환경을 포함해 워낙 많은 것들이 변해 무척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무엇보다 당황스러웠던 것은 내가 생각했던 이비인후과와, 실제 겪게 된 이비인후과 의국 생활의 괴리였다. 중이염이나 축농증 그리고 비염 정도를 보겠거니 했던 나의 예상은 첫날부터 보기 좋게 빗나갔다. 병동 도처에 암환자들이 있었다.
내가 전공하기로 한 학문의 정식 명칭은 이비인후-두경부외과였다. 얼굴과 목 전체에 발생하는 암은 다 우리과에서 봤다. 그래서인지 두경부외과는 병동도 암센터에 있었다. 얼떨떨한 기분으로 따라 들어간 교수님 외래에는 정말로 다양한 환자가 다 왔다. 가볍게는 갑상샘암부터 설암, 편도암, 비강암까지. 얼굴과 목에 이토록 많은 암이 있었는지도 그때 처음 알았다.
"안녕하십니까."
두경부외과 생활이 몇 달 지났을 무렵, 교수님 외래에 신사 한 분이 들어왔다. 쉰 목소리 말고는 다른 어떤 이상도 보이지 않는, 건장한 체구의 중년 남성이었다.
그의 목에는 암덩어리가 자라고 있었다. 크기도 작지 않았다. 교수님은 단호하게 얘기했다.
"후두암입니다. 당장 수술하셔야 합니다."
수술하면 살 수는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보통 수술이 아니었다. 후두 전절제술. 후두 전체를 잘라내는 수술이다. 그렇게 되면 환자는 두 번 다시 성대로 말을 할 수 없게 된다. 코나 입으로 숨쉴 수도 없어 목에 난 구멍을 통해 호흡해야만 한다.
그 신사는 머뭇거렸다.
"선생님, 딱 두 달만 수술을 미룰 수 없을까요? 딸아이 결혼식이 있습니다."
환자의 말에 교수님은 침음(沈吟)을 흘렸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다른 것도 아니고 딸 결혼식이 있다고 하지 않나. 상견례도 해야 하고, 하객들 인사도 받고, 신부입장도 같이 해야 할 텐데. 고작 두 달 아닌가. 그때까지 수술 좀 미룬다고 환자가 어떻게 되지는 않는 거 아닌가.
환자는 마음을 이미 정한 듯했다. 교수님은 만류했지만 한사코 뿌리쳤다. 무슨 말을 한다 해도 먹힐 거 같지 않았다. 나는 교수님과는 달리 필사적으로 환자를 붙잡지 않았다.
그리고 두 달 후, 그 환자가 병원에 찾아왔다.
"암이 식도까지 번졌습니다."
안타깝게도 암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진행해 있었다. 그는 인상조차 변해, 누가봐도 죽음이 임박한 사람으로 보였다.
나는 죄책감이 들었다. 두 달 전, 왜 그를 말리지 않았을까. 나도 적극적으로 수술을 권했다면 결과는 좀 달라지지 않았을까. 물론 교수님 말조차 뿌리치고 갔는데 레지던트 1년 차가 붙잡는다고 그가 생각을 바꾸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죄책감은 점점 커져만 갔다. 그때부터 나는 주말이고 휴일이고 매일 병원에 나가 입원한 그 환자를 마주했다. 하루에 30분이 됐든, 1시간이 됐든, 어떻게든 그의 얼굴이라도 봐야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수술 후 상황은 참담했다. 후두 전절제술에 더해 식도까지 잘라낸 그 환자는 입 안의 침을 받아내기 위해 입에서 목 쪽으로 뚫린 구멍으로 주머니를 달고 있었다. 말은 당연히 할 수 없어 화이트 보드로 겨우 의사소통을 해야만 했다. 의미 있는 소통은 불가능했다. 대개는 아파, 힘들어, 같은 단편적인 단어들뿐이었다.
그러다 어느 날 그가 쓴 문장을 볼 수 있었다. 나는 평생 그 문장을 잊을 수 없다.
‘이제 그만 죽고 싶어요.’
그는 매일같이 찾아오는 내게 어딘지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힘겹게 쓴 화이트 보드를 내밀었다. 그리곤 곧 고개를 떨구었다.
얼마 후 찾아간 그의 장례식장에서 고인과 많이,참 많이 닮은 여성을 볼 수 있었다. 딸이었다. 그는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본인 결혼식 때문에 수술타이밍을 놓쳤다는 죄책감 때문일까.
그 장례식장에서 나는 의사로서 치료의 기회가 있다면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다.
"수술하셔야 합니다."
그때부터일 거다. 내가 유독 암환자들에게, 심지어 내 환자가 아닌 사람들에게도 수술을 적극적으로 권하게 된 것은.
이제 시간이 흘러 나에게도 아이들이 생겼다. 문득문득 그 환자 생각이 날 때가 있다. 아버지라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딸 결혼식보다 더 소중한 자리가 있을까. 설령 내 생명이 곧 다한다 해도 애지중지 키운 딸의 손을 잡고 웨딩마치에 맞춰 걸어가고 싶은 것, 딸의 손을 사위에게 넘겨주면서 행복해하는 딸의 얼굴을 보고 싶은 것, 그게 바로 아버지의 마음 아닐까. 수술을 마다한 그 환자가 한없이 안타깝다가도, 딸의 결혼식을 앞둔 아버지로서의 그를 생각하면 이해가 가기도 한다.
하지만 난 의사다. 그 어떤 경우라도 환자에게 치료의 기회를 놓치는 위험을 감수해도 된다고 말해선 안 된다. 적어도 의사에겐 생명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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