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천주교 두 번째 추기경 정진석... 국내 생명운동 기틀 다져

입력
2021.04.27 2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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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석 추기경 선종


“황우석 교수의 배아줄기세포 연구는 일종의 살인과도 같은 인간 배아 파괴를 전제로 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명백히 반대한다.”
2005년 6월 정진석 추기경이 사제들에게 보낸 강론 자료에서


한국사회가 황우석 전 서울대 교수를 주인공으로 한 영웅신화에 휩싸여있던 2005년 6월, 정진석 추기경은 그 흐름을 정면으로 거스른다. 황 교수 연구의 핵심인 배아를 활용한 줄기세포 연구를 반대한 것이다. 당시 천주교 서울대교구를 관장하던 대주교로서 사제들을 위해 작성한 강론 자료에 담긴 글이었지만 파장은 컸다. 언론을 통해 내용이 공개되면서 천주교와 정 추기경은 황우석 신드롬이 스스로 무너지기까지 오랫동안 성난 대중에게 시달려야 했다. 정 추기경이 가톨릭계 생명운동의 대표자로 자리매김하는 사건이었다. 정 추기경은 학자이자 교회법 전문가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의 삶은 사제가 되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생명과 인간성을 지키는 길과 맞닿아 있다.


서울대 공대생, 사제가 되다

서울의 독실한 천주교 가정에서 태어난 고인은 호흡하듯 가톨릭을 접했다. 호적에 이름이 오르기도 전에 명동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고인과 가까웠던 허영엽 신부가 펴낸 고인의 회고록에는 저녁마다 한 시간이 넘도록 기도를 드리던 가족의 일과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계성보통학교(초등학생)에 다니던 고인에게 교리를 가르친 신부가 얼마 지나지 않아 첫 한국인 주교가 됐으니 고인은 한국 천주교의 현대사와 시작부터 얽혀있었던 셈이다.

고인이 어린 시절부터 사제를 꿈꾼 것은 아니었다. 어린이 도서관에서 과학자들의 위인전을 읽으며 발명가의 꿈을 키운 고인은 1950년 5월 서울대학교 공과대학(화학 공학과)에 진학했다. 6.25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고인은 속세에서 출세의 길을 달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전쟁이 모든 것을 바꿔 놓았다. 피신처에 떨어진 포탄은 눈앞에서 친척 동생을 앗아갔다. 국민방위군에 징집돼 행군하는 동안에도 몇 번이나 종이 한 장 차이로 죽음을 피했다. 과학이 인명을 살상하는 지옥도 앞에서 과학자의 꿈은 서서히 희미해져 갔다. 부산에서 고아들을 돌보던 고인은 1954년 서울대로 돌아가지 않고 신학교에 입학한다. “세상이 이다지도 타락된 원인을 나의 친구, 그대와 내가 어리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소. 만약에 우리가 더 나이가 많았다면 이러한 세상을 만들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 생각하오. 또 그리 되기를 원하는 바외다.” (1951년 고인이 친구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국내 최연소 주교에서 추기경까지

황폐해진 세상에 영적으로, 물리적으로 봉사하기로 결심한 고인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일생을 바쳤다. 신학교 시절 천주교 성인의 일대기(성녀 마리아 고레티)를 영한 번역한 작업을 시작으로 평생 펴낸 책만 50여권이 넘는다. 39세의 나이에 국내 최연소 주교로 임명된 이후에는 청주교구장을 맡아 성당과 사제, 신자를 늘리는데 힘쓰는 한편, 라틴어로 쓰인 교회법전을 6년간 번역해 한국어판을 내놓기도 했다. 2012년 서울대교구장에서 물러난 뒤로도 서울 혜화동의 가톨릭대 성신교정 주교관에 머물며 저술활동을 해왔다. 고인은 하느님의 말씀을 접한다면 누구나 믿지 않을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그를 이끌었다고 고백했다.

2006년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고인을 추기경에 임명한다. 고(故) 김수환 추기경에이어서 한국 천주교가 배출한 두 번째 추기경이다. 천주교가 동아시아 최대 교세를 자랑하는 한국 천주교의 위상을 인정한 것이지만 정 추기경은 스스로를 높이지 않았다. 사목 표어도 주교 서품을 받으며 정했던 ‘모든 이에게 모든 것 (Omnibus Omnia)’을 그대로 쓰기로 했다. ‘모든 사람을 대등하게, 나와 같은 사람으로서 맞이하고 시간부터 생명, 능력과 정성까지 내 모든 것을 다 내놓겠다’는 뜻이다.


"생명 해치지 않고 의학 연구해야"

강론 자료가 유출돼 ‘종교가 과학의 발전을 가로막는다’는 세속의 비판이 쏟아지던 2005년 6월 15일, 고인은 황우석 교수와 명동 주교관의 집무실에서 만났다. 이 자리에서 고인은 정자와 난자가 만나 탄생한 배아를 파괴하는 방식의 줄기세포 연구는 천주교의 입장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음을 분명히 한다. 천주교도 난치병 환자 치료에 적극 찬성하지만 생명을 파괴하는 방식으로는 안 된다고 선을 그은 것이다. 서울대교구는 넉 달 뒤 생명위원회를 발족하고 배아를 활용하지 않는 성체 줄기세포 치료 연구에 100억원을 지원하기로 결정한다. “비록 성당을 몇 개 더 신설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생명위원회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겠습니다. 신자들과 국민여러분의 지지와 도움을 청합니다.”

생명의 존엄성을 지키려는 고인의 뜻은 한 순간 급조된 것이 아니다. 고인은 2006년 ‘뇌사 시 장기 기증’과 ‘사후 장기 기증’ 서약서를 썼다. 2018년 연명치료를 받지 않겠다는 연명의료계획서를 스스로 작성하면서도 “고령이라서 장기기증이 어렵다면 안구라도 기증을 해달라”고 당부했다. 허 신부는 “어머니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썼다. 1996년 먼저 세상을 떠난 고인의 어머니 역시 “죽어서도 좋은 일을 할 수 있다”면서 안구를 기증했다. 주변의 만류에도 고인은 타인을 살리기 위해 모친의 육신을 허는 수술을 끝까지 지켜봤다.


행복하게 사는 것이 하느님의 뜻

낙태죄 폐지에 찬성하는 여론이 늘면서 생명운동을 실천해온 천주교를 향한 도전도 강해지고 있다. 고인은 1961년 사제 서품을 받으면서 “천주교 신자 수가 국민의 10%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지만 국민 가운데 천주교 신자의 비율은 2000년 10%를 넘어섰다가 2015년 되레 한자릿수로 돌아섰다. 차이가 부각될수록 세속과 종교의 길이 다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고인은 행복을 바라는 마음과 하느님의 뜻이 다르지 않다고 강조했다.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행복하게 사는 것이며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이야기다. 지난달 고인이 입원한 직후 병상을 찾았던 허 신부는 고인이 힘겹지만 또렷하게 말했다고 전했다. “모든 이가 행복하길 바랍니다. 행복하게 사는 것이 바로 하느님이 우리에게 바라는 것입니다.”

김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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