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총리실에, 또는 청와대에 에로틱한 여성 팬티 수백 장이 배달되면 무슨 사달이 벌어질까. 사람들 반응은 어떨까. 이런 무례한... 발칙한... 세상 망조야... 라며 혀를 차려나. 아니 무엇보다 이 소포가 제대로 배달이나 될 수 있을까.
심각한 이야기를 하자는 건 아니다. 짧은 해외 뉴스였다. 그런데 주목받지 못한 그 뉴스가 내게는 다른 어떤 뉴스보다 신선하고 시원하고 인간적으로 다가왔다.
프랑스에서 '란제리 시위'가 벌어졌다. 란제리 차림의 여성들이 노출을 허하라며 샹젤리제로 뛰쳐나간 게 아니다. 전국의 란제리 가게 주인들이 56세 남성 장 카스텍스 총리 관저에 일제히 란제리 수백 장을 편지와 함께 선물로 배송한 것이다. 이 단체행동을 주도한 여성의 말이다.
"프랑스의 수많은 속옷 매장이 코로나 방역 대책으로 문을 닫았다. 그런데 슈퍼마켓, 꽃가게, 음반가게, 미용실, 서점 등은 필수 업종으로 지정해 문을 열게 하고, 왜 속옷 매장은 비필수 업종으로 분류하는가. 당신들은 속옷을 입지 않고 사는가. 아침에 일어나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속옷을 갈아입는 것 아닌가? 속옷은 위생과 안전의 문제이기도 하다."
소셜 미디어에는 총리에게 보낸 란제리와 항의 편지 인증 샷이 잇달아 올라왔다. 색색의 우아한 레이스 팬티, 앙증맞은 끈 팬티 등등. 팬티에는 '필수적(essentiel)'이라는 단어를 쓰거나 새겨 넣었다. 여성에게 속옷은 필수용품이라는 의미다.
트위터를 뒤져 봤는데 이런 게 있었다. "숫자를 좋아하는 총리에게 묻습니다. 속옷 가게를 폐쇄해 얼마나 많은 생명을 구했는지 말해줄 수 있나요?"
한 프랑스 언론은 이를 두고 '프랑스식 풍자와 해학'이라고 표현했다. 의견 표명과 항의 방식이 참으로 '프랑스다운' 발상인 것이다.
'프랑스스럽다'고 생각한 다른 뉴스가 있었다. 지난 3월 '프랑스의 오스카상'으로 불리는 세자르상 시상식에서는 한 여성 배우가 당나귀 분장을 하고 등장하더니 옷을 다 벗어던졌다. 그의 배에는 '문화 없이 미래도 없다', 등에는 '우리에게 예술을 돌려 달라'는 글이 맨살에 적혀 있었다. 정부의 장기간 극장 폐쇄에 대한 항의였다. 나체 시위는 생중계됐다.
전 세계에 미투 운동이 번지던 2018년 1월 프랑스 최고 권위지 르몽드에는 프랑스의 대표적 여배우 카트린 드뇌브가 문화·예술계 여성 100명과 연대해 기고한 글이 실렸다.
"우리는 성폭력과 적절하지 않은 유혹을 구분할 만큼 현명하다. 여성의 환심을 사려거나 유혹하는 것은 범죄가 아니다. 우리는 남성과 성에 대한 증오를 불러일으키는 이런 페미니즘은 인정하지 않는다. 성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유혹의 자유는 필수적이다."
다양하고 자유롭고 기발한 생각과 표출 방식이 존재하고 이를 포용하는 사회다. 차이를 인정하는 톨레랑스(관용)다. 무엇보다 유머가 있다. 대체로 죽자사자 으르렁대며 싸우지 않는다.
39세로 당선된 최연소 대통령이 가정을 가진 24세 연상의 고교 은사와 결혼했어도 그러려니 하는 사람들, 심야에 스쿠터를 몰고 엘리제궁을 빠져나와 연인과 밀회를 즐기든, 재임 중에 동거녀를 바꾸든, 사생아를 두었든, 대통령의 연애가 별 문제 되지 않는 나라(실정법을 위반하지 않는 이상). 프랑스인들이야말로 지구상에서 가장 '섹시한' 인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