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ㆍ아세안)의 중재를 받아들이는 듯했던 미얀마 군부가 본색을 드러냈다. 아세안 정상회의의 '즉각적 폭력 중단' 합의는 사흘 만에 휴지조각이 되는 분위기다. '국가 안정'을 핑계로 아세안 특사단 파견 시점을 애매하게 뒤로 미룬 군부 당국은 시민들에 이어 소수민족 반군들에게도 총구를 다시 겨눴다. "거짓말에 능숙한 군부는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것"이라던 미얀마 시민들의 우려가 현실이 되고 있다.
27일 현지매체와 외신 보도를 종합하면 쿠데타 수장인 민 아웅 흘라잉 최고사령관은 전날 밤 군부 방송을 통해 “우리는 국가 안정을 최우선으로 국정을 운영하고 있다”며 “아세안 정상들이 제안한 특사단 입국은 국가가 안정된 이후 허용 여부를 검토해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국가 안정이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적용 시점은 언제인지 등 세부 내용에 관해선 함구했다.
군정 최고 의결기구인 국가행정평의회(SAC)도 모호한 대답을 내놓긴 마찬가지다. SAC는 "아세안의 제안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면서도 특사단 입국 시기에 대해선 "법과 질서가 유지되고 공동체의 평화가 회복될 때"라고만 밝혔다.
사실상 시간끌기 전략을 택한 군부는 특사단 입국 전제조건을 스스로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군경은 전날 밤 양곤과 만달레이에서 시위에 참여하지 않은 시민 2명을 사살한 데 이어 이날 최남단 타닌타리 관구 등에서 실탄을 난사했다. 분노한 시민들은 다시 거리로 나섰다. 이날 양곤 등 전국 각지에서 진행된 시위 현장엔 '아세안을 거부하고 국민통합정부를 지지한다'는 현수막이 대거 등장했다.
아세안 정상회의 전후로 교전이 잠시 멈췄던 국경지역도 준(準)전시 상황으로 돌아갔다. 미얀마군은 이날 오전 태국과 접경지대인 살라윈강 인근에서 소수민족 카렌민족해방군(KNLA)과 전투를 벌였다. KNLA 측은 "이번 교전은 쿠데타 이후 최대 규모였다"면서 "KNLA의 고립 작전에 보급이 막혔던 미얀마군이 자신들의 전초기지를 버리고 도주했다"고 전했다.
아세안은 현지 상황을 지켜보면서 특사단 구성 절차를 독자적으로 이어갈 방침이다. 이와 관련 아세안은 최근 하산 위라유다 전 인도네시아 외교장관을 미얀마 특사로 보내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위라유다 전 장관은 2009년 로힝야족 탈출 사태 당시 미얀마 군부를 강하게 비판했던 인물이다.
유력 후보가 나왔지만 특사단 최종 구성까지는 시간이 더 걸릴 가능성이 높다. 미얀마 군부에 우호적인 일부 아세안 회원국들이 위라유다 전 장관에 반대하는 등 벌써부터 균열 조짐이 나타났다. 아세안은 위라유다 카드가 실패할 경우를 대비해 태국과 싱가포르 출신 후보들도 물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