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판교 회사별로 에이스들은 주요 인터넷이나 게임 업체 채용 사이트만 보고 있어요. 키워놓으면 나가서 고민이 큽니다."
경기 성남시 판교테크노밸리에 위치한 중견 게임사의 인사담당자 A씨는 최근 인재 유출로 겪고 있는 속앓이를 이렇게 털어놨다. 실력 있는 개발자들이 네이버나 카카오, 엔씨소프트 등으로 대기업에 잇따라 빠져나가는 것을 두고 볼 수밖에 없어서다. 입사한 지 채 6개월도 지나지 않은 상태서 나간 직원도 있다는 귀띔도 덧붙였다. A씨는 "더 좋은 조건을 부르는 곳에 가는 걸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되면 중견 업체나 스타트업의 사다리는 끊어지는 셈"이라고 호소했다.
최근 인터넷·게임 업체들이 잇따라 개발자에 대한 성과급과 연봉을 대폭 인상하면서 주요 기업으로의 개발자 쏠림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26일 정보기술(IT) 업계에 따르면 지난 1일부터 10일까지 진행한 네이버 경력공채에선 예상보다 많은 지원자가 몰리면서 채용 기간이 연장됐다. 네이버는 경력 2년 이상의 소프트웨어 개발자를 모집했다. 네이버 관계자는 "작년 경력 공채보다 훨씬 더 몰려 부득이하게 지원자에게 안내 메일을 보냈다"며 "좋은 인재가 많을 경우 쿼터와 관계없이 많이 뽑을 계획"이라고 말했다.
네이버는 최근 주요 IT기업들의 '성과급 인상 릴레이'에 맞서기 위해 파격적인 보너스를 지급하기로 결정했다. 네이버 직원들은 올해 7월부터 3년간 매년 1,000만 원 상당의 자사주를 지급받을 예정이다.
이런 현상은 상장을 앞둔 IT업체에서도 볼 수 있다. 상장 전 입사할 경우 수억 원 상당의 우리사주나 스톡옵션(주식매수청구권)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경력공채를 진행한 카카오페이의 경우 지원 경쟁률이 자그마치 수천 대 1로 알려지면서 판교 일대에서 큰 화제가 됐다.
이런 현상은 비대면 문화 확산으로 IT 인력 수요는 급증한 반면 쓸만한 개발자 수는 크게 부족하면서 발생하고 있다. 한국소프트웨어정책연구소에 따르면 올해 인공지능(AI), 빅데이터 등 주요 IT 분야에서 부족한 인력 규모는 9,453명으로 추정된다. 국내 소프트웨어 기업의 47.9%는 '필요한 역량을 갖춘 인력 부족'을 채용 과정에서의 애로 사항으로 꼽았다.
판교 인터넷, 게임 기업들이 개발자에게 제시한 조건이 워낙 좋다 보니 삼성전자나 SK텔레콤 등 전통의 취업 선호도 1순위 기업에서조차 이직자들은 늘고 있다. 최근 직장인 익명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블라인드에서는 삼성전자 무선사업부 임원 A씨의 이직 소식이 화제였다. 갤럭시 스마트폰에 들어가는 주요 소프트웨어(SW)를 개발한 A씨가 팀원들과 함께 쿠팡으로 이직했다는 소식에 직원들의 박탈감도 컸다.
중소 스타트업의 경우엔 인력 채용 자체가 어려울 지경이다. 한 모바일 응용소프트웨어(앱) 스타트업 대표는 "경쟁사가 연봉 1,000만 원을 올려 어쩔 수 없이 우리도 맞춰 올릴 수밖에 없었다"며 "갑자기 늘어난 인건비에 경영상 부담이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토로했다.
IT업계 내부에선 "소수의 인터넷 서비스를 제외한 상당수의 플랫폼 기업들은 아직까지 이익을 거두는 구조가 아닌 초기 단계인 만큼 갑작스러운 인건비 부담 증가는 전체 IT 생태계에 악영향으로 돌아올 것"이란 지적도 팽배하다.
IT업계 관계자는 "이미 상장했거나 상장 계획 없는 중견 기업의 경우 경력직 채용 과정에서 제시할 당근이 없는 상황"이라며 "이에 일부 회사에서는 자체 가상화폐를 발행·상장해 개발자에게 지급을 약속하는 등의 방안까지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