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절기마다 급성 축농증을 앓는 직장인 A(33)씨. 한 달간 주 2회 정도 의원을 다녀오면 증상은 나아지지만, 치료가 끝나도 A씨를 숨 막히게 하는 일이 아직 남아있다. 바로 보험사에 실손보험금을 청구하는 일. A씨는 “시대가 언제인데 아직도 매번 청구할 때마다 수십 장의 A4용지를 휴대폰으로 일일이 찍어야 한다”고 토로했다.
25일 보험업계에 따르면 '제2의 국민건강보험'이라 불리는 전체 실손보험 청구건수 중 종이서류 없이 처리된 비중은 0.002%(1,420건)에 불과했다. 99%의 보험금 청구는 종이서류를 바탕으로 이뤄지고 있어 실손보험 소비자들의 불편이 지속되고 있다는 뜻이다.
금융당국과 보험업계도 종이 서류 없이도 환자가 병원에 요청만 하면 전산으로 보험금이 청구되는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를 추진하고 있으나, 의료계 반발에 부딪혀 진척을 보지 못하고 있다. 다만 최근 국회에서 보험 청구 간소화를 위한 법안이 잇따라 발의되면서 관련 법안이 올해 국회 문턱을 넘을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의 역사는 2009년까지 올라간다. 당시 국민권익위원회는 실손보험 청구 절차가 복잡하다며, 금융당국에 절차 개선을 권고했다. 이에 제각각이던 실손보험 청구서류가 표준화되고, 청구 금액에 따라 증빙서류도 간편화됐다. 휴대폰 앱으로 청구하는 것도 가능해졌다.
그러나 이런 개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문제의 본질, 실손보험 가입자들이 병원·약국에서 종이서류를 발급받은 후 직접 방문·팩스·이메일·앱 등을 통해 보험사에 전달해야 한다는 점은 10년 넘게 그대로다.
청구절차가 불편하다 보니 소비자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행사하는 것도 어려워졌다. 금융위원회와 보건복지부가 2018년 한국갤럽에 의뢰해 공동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실손보험 가입자의 보험금 미청구 비율은 47.5%에 달했다. 미청구 이유는 △병원 방문이 귀찮고, 시간이 없다(44%) △증빙서류 제출이 복잡하다(30.7%)였다. 사실상 보험소비자의 정당한 보험금 청구권리가 후진적 제도로 인해 제대로 행사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실손보험 가입자·금융당국이 한목소리로 요구하지만 그럼에도 10년 넘게 논의는 공전하고 있다. 의료계가 적극 반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의료계는 △의료기관은 서류 전송 의무가 없다는 점 △환자의 개인정보가 유출될 수 있다는 점 등을 반대 이유로 내세웠다. 지규열 대한의사협회 보험이사는 “(청구 간소화가) 비급여 관리를 위한 수단으로 활용될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다.
10년째 공전하던 간소화 논의에 올해는 다른 분위기가 감지된다. 우선 국회서 문제 해결을 위한 관련 법안이 연이어 발의되고 있다.
지난해 전재수·고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윤창현 국민의힘 의원이 각각 대표 발의한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를 골자로 하는 보험업법 개정안이 계류된 가운데, 최근에는 김병욱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의료기관의 전자증빙자료 발급을 핵심으로 한 '보험업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특히 이번 개정안에는 '심사평가원이 서류전송 업무 외에 다른 목적으로 정보 사용을 금지한다'는 조항이 담겼다. 의료업계가 가장 크게 걱정하는 비급여 관리에 대한 우려를 덜어주는 부분이 추가된 것이다.
청구 간소화로 인한 보험금 청구액 급증에 대한 부담감이 있었던 보험업계도 21대 국회에서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 관련 법안이 통과되기를 바라고 있다. 보험업계 관계자는 "매년 약 5억 장이 넘는 서류를 사람이 직접 수기로 입력해야 한다"며 "인건비·유지비를 고려하면 간소화가 더 이득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됐다"고 말했다.
정치권 관계자는 "의료계의 걱정을 반영한 개정안이 발의됐고, 보험업계도 법안 처리를 바라고 있는 만큼, 이번 국회에서 합의를 볼 가능성이 높아진 상황"이라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