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오전 9시(현지시간) 인도네시아 수도 자카르타 도심의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아세안) 사무국 건물. 평소보다 경비가 삼엄하다. 담 밖으로 경찰 간이 천막들이 설치됐고, 시위 진압용 장비들이 즐비하다. 입구 근처에 서 있거나 안으로 들어가는 군인들의 모습도 보인다. 담을 끼고 인도에 화환이 늘어섰던 이전 풍경과 사뭇 다르다.
문 앞에서 대기하는 경찰에게 "코레스폰덴(Korespondenㆍ특파원)"이라고 밝히고 인도네시아 외교부 출입기자증(Press Card)을 보여주자 잠시 동료들과 상의하더니 "노 프레스(No Pressㆍ언론은 안돼요)"라고 외쳤다. 잠깐 정차도, 사진 촬영도 막았다. 행인들도 뜸했다.
아세안 사무국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인해 1년째 팀장 이상을 제외한 직원들을 재택 근무시키고 있다. 이날도 정상회의 준비 인원 외에는 출입을 하지 말라고 공지했다. 다음 날 아세안 특별 정상회의 개최를 앞두고 만전을 기하는 모습이 확연했다.
아세안 정상들은 이곳에서 24일 오후 만난다. 2019년 11월 태국 방콕 정상회의 이후 약 1년 반 만이다. 미얀마 사태 해결 방안을 위한 특별 회의다. 올해 의장국은 브루나이지만 이번 회의를 제안한 역내 맏형 인도네시아가 주도하고 있다. 정상회의 전날엔 외교장관 만찬이 열린다. 아세안이 고수하는 '내정 불간섭' 원칙을 깨고 실질적인 해법을 마련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양쪽에 기대와 우려가 달린 저울추는 우려 쪽으로 기울고 있다.
시작 전부터 김이 빠진 형국이다. 태국과 필리핀 정상은 불참을 선언하고 외교장관을 대신 보내기로 했다. 일부 외신이 미얀마 군정, 말레이시아, 태국 고위 관료를 인용해 쿠데타 주역 민 아웅 흘라잉 미얀마 최고사령관이 회의에 참석할 것이라고 밝혔지만 미얀마 현지에선 참석 여부가 확정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최고살인자인 흘라잉은 국제 법정에 세우고, (반(反)군부 진영과 소수민족이 꾸린) '국민통합정부(NUG)' 대표를 초청해야 한다"는 미얀마 시민들의 거센 요청도 부담이다. 더구나 구호에 그친 유엔의 선례가 있어 '국제기구 무용론'까지 거론되는 상황이다.
10개 회원국 간 이견도 풀어야 할 숙제다. 현재 미얀마 사태 해결에 적극적인 나라는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정도다. 다른 회원국은 사실상 침묵하거나 "안정 희망" 정도의 원론에 그치고 있다. 지난달 2일 인도네시아 주도로 열린 아세안 특별 외교장관회의도 실질적인 해법은 제시하지 못한 입바른 선언에 그쳤다. 형식조차 회원국 모두가 동의한 '공동' 성명보다 격이 낮은 '의장' 성명이었다. 그래서 이번 회의도 국제무대에 처음 등장하는 흘라잉 최고사령관에게 변명의 기회만 줄 수 있다는 우려가 크다.
중국의 참견도 거슬린다. 이날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왕이(王毅) 중국 외교부장은 "아세안 정상회의가 미얀마 사태 '연착륙'의 좋은 출발"이라면서도 "상황을 악화시키고 지역 불안정을 가중시키는 외부로부터의 부적절한 개입은 피해야 한다"고 훈수했다. 아세안의 내정 불간섭 원칙을 에둘러 강조한 것이다.
다만 아세안 정상들이 미얀마 사태를 풀기 위해 직접 머리를 맞대는 것은 일단 고무적이다. 국제사회에 미얀마의 참상을 알리고 있는 크리스틴 슈래너 버기너 유엔 미얀마 특사도 자카르타에서 아세안 정상들을 만날 예정이다. 미얀마 입국이 금지된 그의 입국 성사 여부도 관심사다.
미얀마 현지에선 21일 밤 집 앞에서 씻고 있던 14세 소녀가 오른손에 총상을 입는 등 군경의 주택가 급습이 계속되고 있다. 의사들은 "시위 부상자들을 치료하게 해달라"고 군부에 호소하고 있다. 지난번 외교장관회의 다음날은 미얀마 전역에서 30명 넘게 희생돼 '피의 수요일'로 기록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