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무슨 짓을 한 거지?” 만삭으로 나섰던 집에, 아이를 안고 돌아오던 날 스스로 몇 번을 되물었는지 모른다. 걱정이 가득했던 탓이다. 내 한 몸 건사도 어려운데 나는 이 아이의 안전, 건강, 행복을 다 어떻게 책임지려는 계획이었을까. 나도 누군가의 준비된 보호자일지 모른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은 어디서 나왔던 거지. 내가 미쳤구나.
국민 육아 멘토 오은영 박사의 어록도 귀에 꽂혔다. “돼요 안 돼요? 이런 질문을 너무 하지 마세요. 부모는 뭐가 옳은지, 때론 대신 판단해 줄 어른이에요. 괜한 선택권을 주지 말고 답을 정해 정확히 알려줘야 해요.” 이걸 확대해석하며 나는 또 뒤척였다. “어떻게 사는 게 옳은지, 나도 아직 모르는데!”
더구나 이 세계는 점점 내가 해본 대로 아는 대로 주장한다고 아이들이 무사할 수 있는 세상이 아니었다. 아이가 잠든 밤이면 스미는 건 늘 자책이었다. AI와 일자리를 놓고 다퉈본 바가 없는 내가, 가파르게 변하는 세상에 대비할 생존기술도 전략도 없으면서 멋대로 엄마가 된 게 아닐까. 매일 엄마로 산다는 건 이런 우스꽝스러운 자책을 극복하려는 과정이었다. 동시에 이런 공포 탓에 오직 내 아이만 위하는 괴물이 되는 건 아닐지 자주 소스라치는 불안이기도 했다.
원죄랄까. 이런 마음을 한 켠에 품은 모자란 보호자 입장에서는 참 생경한 장면이 하나 있다. 정치인들이 스스럼 없이 모두의 부모를 자처하는 모습이다. 굳이 엄마의 마음으로 시정을 돌보겠다고 약속하고, 아빠의 마음으로 2030 유권자를 보듬겠다 각오한다. ‘나 또한 누군가의 부모이며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라는 인간미를 어필하려는 의도겠으나, 정말 영리한 전략일까. 의문이다.
모든 기준을 스스로 세우는 MZ세대가 정치인의 이런 ‘부모’ 레토릭을 접할 때 보이는 반응은 대체로 이렇다. “아빠 미소로, 엄마 미소로 들어줄 테니 그만 징징거리란 말 아니야?” 적당한 ‘우쭈쭈’로 때우려는 배신의 예고로 본단 얘기다. “아빠 엄마 마음으로 결국 정책 방향 결정은 알아서 한단 말 아니야?” 그래도 내가 더 어른이라는 자만의 발로로 본단 얘기다. “모름지기 남의 마음을 잘 아는 건 애를 키워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는 거 아니야?” 내심에 지닌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를 들키고 만 투명한 자백으로 본단 얘기다. 불온하고 부당하고 부적절하단 생각만 일으킨단 뜻이다.
지지율이 탄탄할 때, 여권에서 가장 자주 보인 열쇠 말은 ‘책임정치’였다. 옳다고 판단한 정책을 알아서 밀어붙이되 결과로 책임지겠다는 각오였다. 그런데 민심 이반이 커지자 돌연 ‘책임’의 자리를 ‘엄마 마음, 아빠 마음’ 같은 표현이 대체한다. 퇴행에 가깝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똘똘한 전략 같지가 않다. 여권의 숱한 아빠, 엄마는 2030 유권자에게 어떤 존재로 기억돼 왔던가.
모두가 따뜻한 개천에서 가재로 살자더니 딸의 입시를 위해 모든 기회를 최대치로 활용한 남의 집 아빠와 엄마. 내가 심히 아프면 군 상관에게 전화해 줄 보좌진을 완비한 남의 집 엄마. 불리한 사실을 알린 제보자의 이름쯤은 쉽게 공개하는 남의 집 아빠. 고 김용균씨 엄마가 칼바람 속에 단식농성을 하는데도 중대재해기업처벌법에는 수세적인 남의 집 아빠.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망사고’를 두고 “신경을 썼으면 그랬겠냐”며 고인을 탓하는 남의 집 아빠. 그렇게 엄마, 아빠라는 기호를 ‘남몰래 제 아이만 위하는 자’로 오염시킨 정치권이, 구태여 이를 다시 남용까지 하는 이유를 도통 모르겠다.
우는 아기는 많은 경우 어른이 따뜻하게 안고 한참을 다독이면 훌쩍임을 그치고 안도한다. “그랬구나. 여기 아야 했구나. 정말 많이 속상했구나.” 그렇게 사랑 받는단 확신만 얻어도 망설임 없이 제 장난감을 찾아 나선다. 하지만 시민, 국민은 나이를 불문하고 이런 영유아가 아니다. 장난감은커녕 밥과 지붕과 사다리를 뺏겨 화가 난 유권자다. 정부와 의회가 제 할 일을 똑바로 하는지 확인하기 위해 눈을 부릅뜬 주권자다. 이들이 절실하게 기다리는 건 난데 없는 부모 호소인이 아니라 그냥 상식적 동료 시민 수준의 감수성을 지닌 정치인과 정당의 출현이다. 그걸 무섭게 여기는 정치인이라면, ‘부모 자임하기’는 아무래도 자제하는 편이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