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차 시대에 더욱 귀한 몸 된 구리

입력
2021.04.24 0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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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가 사용한 최초의 금속, 구리
장신구·놋그릇·수도꼭지·도어록 등 생활 곳곳에
채굴, 제련,  전기분해 거쳐 99.99% 전기동으로
전기차 1대에 구리 80㎏ 필요… 가솔린차의 4배

구리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대부분 금메달과 은메달 다음으로 받는 ‘동메달’이나 학창시절을 고단하게 만들었던 주기율표 속 구리의 원소기호(Cu)를 떠올릴 것이다. 가수 싸이는 데뷔곡 ‘새’에서 자신에게 상처를 준 옛 연인을 향해 ‘이 10원짜리야!’라고 해 구리를 ‘싸구려의 대명사’로 폄하했지만, 런던금속시장(LME)에서 거래되는 전기동(電氣銅·전기분해를 거친 높은 순도의 구리) 1톤의 가격은 9,400달러(약 1,050만 원)에 달한다. 톤당 약 101만 원(열연강판)인 철보다 10배 이상 비싸다.

이처럼 구리가 몸값 높은 귀한 금속이 된 건 아득한 인류 문명의 초창기부터 4차 산업혁명이 벌어지고 있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오랜 기간 경제산업 전반에 활용된 덕분이다. 구리는 인류가 사용한 최초의 금속으로, 약 1만 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치료와 소독 목적으로 구리를 사용했다. 이는 구리가 가진 항균성을 활용한 것으로, 종이가 발명되기 전 이집트에서 기록용으로 쓰던 파피루스에는 이집트인들이 감염 치료와 물을 소독하는 데 사용했다고 기록돼 있다.

파라오 쿠푸왕의 피라미드에서는 약 5,000년 전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구리 소재 배수관이 발견됐는데,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온전한 상태를 유지해 세인들을 놀라게 했다. 기원전 2세기경에는 동판에 성서를 새겼다. 1947년 이스라엘 쿰란 지역에서 구약성서 사본인 사해 문서(Dead Sea Scrolls)가 발견됐는데, 대부분의 양피지(羊皮紙) 사이에 주석이 1% 함유된 동판사본이 세 개 섞여 있었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13세기부터 금속활자를 동과 청동으로 주조했다. 뉴욕의 상징 자유의 여신상은 1884년 구리 81.19톤을 녹여 제작했다. 청동으로 만든 것으로 오해하지만 여신상 특유의 청녹색은 사실 구리가 산화된 색깔이다. 1975년 준공한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의 돔도 구리의 원래 색인 갈색이 산화되며 점차 고풍스러운 회녹색으로 변했다.

일상에 쓰이는 구리, 채굴·제련 등 거쳐 순도 99.99%로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구리는 현대인의 일상 전반에서 발견할 수 있다. 전자기기를 사용할 때 전기를 실어 나르는 전력선, 통신선, 놋그릇이나 동전은 물론, 건축자재로 쓰이는 동파이프, 수도꼭지나 밸브, 도어록도 구리를 가공해 만든다. 동상이나 종, 공예품 등의 예술품에도 구리가 사용된다.

일상의 필수품이 된 구리는 순도 99.99%다. 동광석에서 이런 구리가 되기까지는 채굴과 제련 등의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광석 상태의 동은 주로 환태평양조산대와 중앙아프리카에 매장돼있다. 동광석을 채굴하면 다음 작업은 어마어마한 무게를 줄이는 일이다. 구리(Cu) 함량이 1% 미만에 불과한 광석에서 불순물을 제거하면 순도가 25%까지 높아져 운송비를 25분의 1로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동을 분쇄해 가루로 만들고 물에 띄워 가라앉는 부분은 제거하고 뜨는 성분만 골라내는 방식으로 정제한 동을 제련소로 옮긴다.

이렇게 불순물을 걸러낸 구리를 '정제조동'이라 하는데, 순도가 99.5%에 이른다. 하지만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다. 순도를 99.99%로 끌어올려 전도성을 높이기 위해 전기분해를 하는 이른바 전해정련(電解精鍊·전련)을 거친다.

전기동 순도 높이는 비결, 교과서 속 '전극실험'

전기분해 과정은 과학 교과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극실험을 생각하면 쉽다. ①먼저 황산용액이 담긴 수조에 99.5% 구리판과 비슷한 면적의 스테인리스 스틸판을 넣고 각 판에 전류를 흘려준다. ②전류가 99.5% 구리판에서 시작해 황산용액을 거쳐 스테인리스 스틸판의 순서로 흐른다. ③이런 전류의 흐름에 따라 구리판에 있는 구리이온이 황산에 녹게되고, 녹은 구리이온은 스테인리스 스틸판에 붙는다. ④스테인리스 스틸판에는 대부분 순수한 구리만 붙고 기존 동판에 있던 불순물 0.05%는 황산용액에 이온상태로 용해되거나 용액 바닥에 검은색 점액질로 가라앉는다. ⑤슬라임이라고 불리는 이 검은색 점액질에는 금이나 은, 팔라듐, 백금, 텔레늄, 셀레늄 등의 귀금속과 희소 금속이 포함돼 버리지 않고 다음 귀금속 공정에서 회수하게 된다. ⑥일주일 간의 전해정련(electro-refining) 공정을 마친 후 스테인리스 스틸판을 수조에서 꺼내어 스틸판에 붙은 구리를 분리하면 순도 99.99%의 '전기동'이 완성된다. 전기동은 순도가 100%에 근접해 열과 전기 전도성이 뛰어나다. 전기나 전자기기, 통신, 자동차, 항공우주 등 첨단산업의 주요 소재로 사용된다.

돈의 흐름 알고 싶다면, ‘구리 가격’ 주목해야

구리는 돈의 흐름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당연히 글로벌 시장에서 구리에 대한 관심은 항상 뜨겁다. 경제흐름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특징 때문에 구리는 주가와 함께 경기예상지표로도 활용된다. 생산지역이 광범위해 석유나 금보다 정치적·지정학적 영향을 적게 받는 게 구리가 ‘박사’로 대접받으며 ‘닥터코퍼(Dr. Copper)’로 불리는 이유다.

2001년 톤당 1,577달러였던 전기동 가격은 2011년 10년 만에 8,811달러까지 6배 가까이 치솟았다. 미국과 함께 'G2'로 부상한 중국 경제가 급격히 성장하면서 도로와 건물, 공장 등 산업 인프라 건설이 늘어난 영향이 컸다. 전선과 건축자재 등이 증가하면서 구리 사용량이 늘었고 선물투자도 활발해지며 구리 가격이 급등했다.

전세계 전기동 생산규모는 연간 약 2,300만 톤, 금액으로는 한화 230조 원에 달한다. 구리 가격 상승세는 전기자동차와 의료기기 개선 등 4차 산업혁명과 맞물려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전기차 한 대에 들어가는 구리는 약 80㎏이다.

가솔린 엔진 중형차(약 20㎏)에 비해 사용량이 4배 많다. 전기차 시장이 폭발적으로 커지고 있어 구리 소비량 증가세는 더 가팔라질 것으로 보인다. LS니꼬동제련 영업부문장 이동수 전무는 “구리시장은 인도와 동남아시아의 급속한 성장과 전기차 수요 증대 등을 토대로 지속적으로 커질 것으로 보인다”며 “구리 자원은 유한하기 때문에 원료공급 확대와 새로운 수요 창출, 원가절감, 품질 제고가 세계 동산업계 공통 과제”라고 설명했다.

박지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