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탈시설이란? 장애인을 특정 시설이 아닌 지역사회에서 자율적으로 살아가며 공존할 수 있게 하는 것.”
장애인 탈시설은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직후 내놓은 100대 국정과제 중 42번째였다. 역대 정부 중 처음으로 '장애인 탈시설' 문제를 정책 과제로 선정했다. 장애인들이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특정 시설에 갇혀 각종 인권 침해를 당하는 상황을 제도적으로 막겠다는 취지였다. 문 대통령은 지원센터 설치와 자립 지원급 지급 등도 약속했다. 장애인들의 기대도 컸다. 하지만 4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고 있다. 정부는 물론 국회가 정책 추진에 소극적이었기 때문이었다.
한국일보가 20일 최혜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을 통해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정부는 2019년 ‘장애인 거주시설 탈시설-자립지원을 위한 민관협의체’를 운영해 ‘탈시설 10년 로드맵’ 연구를 진행했다. 주무부처인 보건복지부와 장애인 단체 대표, 전문가 등으로 구성된 민관협의체는 10차례 정도 회의를 열고 △탈시설 지원체계 △탈시설 단계별 서비스 유형 △탈시설 국가계획 10년 등을 논의했다.
이 연구결과를 토대로 탈시설 정책이 구체화돼야 했지만, 2년간 해당 자료는 공개조차 되지 않았다. 복지부와 탈시설 운영자, 지방자치단체, 장애인 보호자 등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엇갈린다는 이유로 정부가 발표를 미룬 것이다. 더구나 해당 논의가 진행 중이던 2019년 9월 국가인권위원회도 정부를 향해 “거주 시설 장애인들이 겪고 있는 인권 침해가 심각하다”며 “정부와 민간이 함께하는 ‘장애인 탈시설 추진단’을 구성하고 ‘장애인 탈시설 로드맵’을 마련하라”고 권고까지 했지만 지켜지지 않은 것이다. 당시 회의에 참여했던 장애인 단체 관계자는 한국일보와의 통화에서 “최근 정부는 ‘탈시설’ 정책이 아니라, 지역사회 통합 돌봄 쪽으로 방향을 잡는 듯하다”며 “이는 본질을 피해가는 해결책”이라고 지적했다.
국회도 소극적이었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20대 국회에서는 ‘탈시설’ 논의를 담은 장애인복지법 등 4개 법이 발의됐지만 임기만료로 모두 폐기됐다. 21대 국회에서도 최혜영 의원 등이 지난해 12월 ‘장애인 탈시설 지원 등에 관한 법률안’을 발의했지만, 4개월이 지난 현재까지 상정조차 되지 않았다. 20, 21대 국회 상임위 회의록 전체를 훑어도 ‘탈시설’이라는 단어는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를 비롯해 어느 상임위에서도 논의되지 않고, 뒷전으로 밀려나 있다는 얘기다.
최 의원이 발의한 법에는 △장애인의 자기결정권 명시 △탈시설 전·후 지원체계 구축 △지역 탈시설지원센터 설치 등의 내용이 담겼다. 발레리나 출신으로 척수 장애를 겪고 있는 최 의원은 “시설 위주의 장애인 정책은 국가에 의한 제도적 학대이자 명백한 차별과 다름없다”며 “최대한 빨리 관련 법 논의를 시작해 장애인에게도 ‘보통의 삶’을 보장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