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이 더는 '이남자(20대 남자)'란 용어를 쓰지 말아야 한다. 왜 20대의 억울함을 이용해 약자 대 약자의 싸움으로 몰고 가는가."
2018년 지방선거에 이어 서울시장 선거에 두 번째 도전장을 낸 신지예 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 대표는 페미니즘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 정치인이다. 3년 전 고개를 든 당당한 표정에 '페미니스트 서울시장'이라고 쓴 선거 벽보는 지금도 회자된다. 신 대표는 이번 선거 기간 역시 페미니즘을 앞세워 '평등한 사회'를 외쳤다.
13일 서울 종로구 새문안로 사무실에서 한국일보와 만난 신 대표는 이남자라는 말에 대해 "20대 남성이 정말 반(反)페미니즘적이냐"라고 되물으며 부적절한 표현이라고 비판했다. 오히려 윗세대 남성보다 페미니즘에 우호적이라고 했다.
정치권과 언론이 사회적 약자인 20대 남성과 여성이 대결하게 하는 '을(乙)들의 싸움'을 만들어 악용하고 있다고 성토했다.
신 대표는 이번 서울시장 선거에 나서며 시민들이 기후위기 문제를 심각하게 보고 있다고 느꼈다고 했다. 기후위기가 일상과 가장 직접적으로 연결된 문제인 만큼 최우선으로 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선거 결과 진보 진영 전체에 닥친 문제점들이 드러났다며, 진영의 판을 새롭게 짜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울시장 선거 방송3사 출구조사 결과 20대 남녀의 표심은 엇갈렸다. 20대 남성의 72.5%는 오세훈 시장에게 표를 던졌다. 반면 오 시장을 찍은 20대 여성은 40.9%였다. 대신 20대 여성의 15.1%는 군소 후보들을 지지했다.
이를 두고 20대 남성은 반페미니즘, 20대 여성은 페미니즘 투표를 했다는 분석이 나왔다. 그러나 신 대표는 이를 단순히 페미니즘 대 반페미니즘 구도로 봐선 안 된다고 경계했다.
-오 시장에게 표를 몰아준 20대 남성 표심이 관심을 끌었다. 일부는 페미니즘에 거부감을 느낀 투표 성향이라고 평가했는데.
"20대 남성은 50·60대 남성과 비교해 젠더 감수성이 뛰어나다. 성폭력이 나쁜 일이란 걸 안다. '어떻게 남자가 부엌에 들어가나' 이런 얘기도 안 한다. 성차별을 넘어 평등한 사회로 가야 한다는 인권 의식은 남녀 가리지 않고 2030세대 모두 뛰어나다."
-정치권 일부에서는 여권이 '이남자'를 소홀히 했다고 분석한다.
"거대양당(더불어민주당, 국민의힘) 모두 이번 선거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다. 정치권이 이남자라는 표현을 쓰는 건 청년의 아픔에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태도 탓이다. 소수자 집단끼리 서로를 비난하고 다투도록 부추겨 상대에 대한 혐오를 만들고 이를 악용한다.
청년들은 기존 세대만큼 삶의 안정성을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대학을 나와도 취업을 못한다. 집값과 물가는 너무 높다. 이런 문제를 정치권이 여성과 소수자, 난민 등 사회적 약자들 탓이라고 몰아가며 청년의 분노를 부추긴다. "
-2030의 남녀 표심이 다르게 나타난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는가.
"2030 여성은 제3 후보를 찍을 수밖에 없었다. 이번 선거의 중요한 이슈는 '미투(Me too)'였다. 성폭력에 직접 영향을 받은 2030 여성은 국민의힘을 찍지 않았다. 국민의힘 또한 성폭력과 성차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번 선거가 장애인 차별과 같은 다른 소수자 의제로 일어났다면 이에 직접 영향을 받는 유권자들은 또 다른 선택을 했을 것이다."
-이남자란 표현이 불필요한 논쟁을 일으킨다고 보는가.
"그렇다. 원래 정권 중반 때만 해도 '이영자(20대, 영남, 자영업자의 줄임말. 문재인 정부에 대한 민심 이탈이 심한 계층)'란 표현을 썼다. 이남자가 된 건 민주당 내부 보고서에서 '20대 남성의 지지율이 떨어지는 게 20대 여성 때문'이란 표현이 나오면서다. 이때부터 이남자와 이여자(20대 여자)란 상충하는 프레임이 만들어졌다.
20대는 성별과 관계없이 공정을 말한다. 공정은 진보와 보수의 문제가 아니다. 기존 룰을 잘 지키자는 건데 이걸 왜 갈등 이슈로 만드는가. 20대 남성이 보수적이며 반페미니즘이라고 몰고 가는 건 오히려 폭력이다. 프레임을 만들어 진영화하고 특정 계층을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몰아가려는 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신 대표는 이번 선거에서 기후위기를 주요 담론으로 꺼냈다. 첫 번째 공약도 탄소중립이었다. 비록 부동산 문제와 페미니즘, 성소수자 논란에 묻히긴 했지만, 신 대표는 선거를 뛰면서 3년 전보다 기후 문제의 심각성을 체감하는 국민이 늘었다고 했다.
-이번 선거에서 유권자들이 관심을 가진 이슈는 무엇이라고 보는가.
"기후위기가 심각한 문제라고 느끼는 사람이 이전보다 많이 늘어난 것 같다. 40~50년 뒤 엄청난 위기가 될 수 있으니 지금 당장 풀어야 할 숙제라고 생각한다. 청년 주체 토론회에 가면 늘 빠지지 않고 등장한 이슈가 기후위기였다."
-시민들이 꼽은 시급히 해결해야 할 환경 문제는 무엇이었나.
"쓰레기 대란이다. 골목에 쌓이는 쓰레기를 보면서 이걸 처리할 방법이 없다는 데 시민들이 많은 무력감을 느낀 것 같았다. 서울시는 시민이 버리는 쓰레기를 감당하지 못한다. 인천 매립지는 꽉 찬 상태고, 소각하자니 유해 물질이 걱정된다. 이게 또 미세먼지로 돌아온다. 결국 플라스틱을 줄여야 한다."
신 대표의 선거 벽보와 현수막은 선거 때마다 훼손됐다. 이번 선거도 마찬가지다. 신 대표는 벽보 훼손이 단순히 후보 개인에 대한 공격이 아닌 여성 전체에 대한 공격이라고 주장했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혐오와 당당히 맞서 싸우겠다는 자신감도 내비쳤다.
-선거 때마다 늘 벽보 훼손을 당한다. 이를 혐오 정서라고 표현했다.
"많은 여성·소수자 후보가 벽보 훼손을 당했는데, 소수자에 대한 혐오 문화가 범람했다는 방증이다. 지역 주민들은 훼손된 벽보를 보면서 이런 사람들과 같은 동네에 산다는 점에 공포를 느낀다. 내가 벽보 훼손을 당한 뒤 혐오와 맞서겠다고 말한 이유다."
-이번 선거에선 성소수자 문제도 주요 이슈로 떠올랐다.
"한국 사회에서 성소수자 혐오가 심각하다는 걸 다시 한번 느꼈다. 성소수자들은 이런 논란을 거치면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한 느낌을 받는다. 삶에 대한 엄청난 위협이다. 이들이 등을 비빌 언덕을 만드는 데 정치가 나서야 한다."
신 대표는 무소속으로, 6명의 부시장 후보와 러닝메이트를 이룬 '팀서울'이란 이름으로 출마하는 새로운 시도를 했다. 그러나 득표율은 0.37%로 낮았다. 신 대표뿐 아니라 많은 진보 후보의 성적도 저조했다. 성평등 이슈를 꺼낸 진보진영 다섯 명의 합계 득표율은 1.9%에 그쳤다.
신 대표는 이를 두고 "진보정치의 위기"라고 평가했다. 제대로 된 진보 인사가 출마하지 않은 탓도 있다고 주장했다.
-진보진영 후보들의 득표율이 낮아 진보의 위기란 평가도 나왔다.
"진보의 위기가 맞다. 민주당은 촛불 정부를 만들었다고 자임했지만 광화문에 촛불을 들고 나온 시민들과 한 약속을 어겼다. (민주당의) 정치적 명분도 사라졌다. 진보는 완전히 새롭게 재구성돼야 한다. 어디에 반대해 생기는 세력이 아니라 이 문제를 어떻게 풀지 해답과 비전을 공유하는 세력을 재구성해야 한다."
-진보진영 전체의 득표율이 낮은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는가.
"제대로 된 진보 후보가 없었다는 게 문제다. 원내정당인 '기본소득당이 진보정당이냐'고 묻는다면 원내 진출을 위해 비례 위성정당에 합류한 편법을 이용했다고 답하겠다. 과정 역시 정의로워야 진보다. 이건 기본소득당이 깊이 고민해야 할 문제다.
이번 선거에서 여성의당이 보여준 모습도 다양한 시민을 품을 대안 정치세력으로서는 한계가 있었다. 김진아 후보가 내건 슬로건 '여자 혼자 살기 좋은 서울'도 지금 당장 정치가 나서야 하는 의제인 건 맞다. 그러나 그것만 중요하게 여기면 다양한 삶을 지닌 사람들은 삭제된다.
생물학적 여성이 아닌 여성, 아이를 양육하는 여성, 결혼하지 않고 파트너십을 맺은 가구는 어떻게 보장할 건가."
-진보진영의 재구성을 주장했다. 어떤 세력과 함께할 수 있나.
"일단 풀고 가야 할 숙제가 있다. 정치인들이 법을 만들면서 법을 어기는 문화를 벗어나야 한다. 편법과 꼼수가 만연한 정치를 그만해야 한다. 정치도 실수할 수 있다. 다만 반복되면 고의다.
민주당은 실수를 많이 반복했고 사과도 하지 않았다. 다음에 등장할 새 정치 세력은 편법과 월권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해야 한다. 새로운 진보 이슈에 대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야 한다. 하루빨리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