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지지 않는 나라.’ 한때 영국을 표현하는 수식이었습니다. 세계 곳곳에 식민지를 경영하며 위세를 떨쳤으니 저 짧고도 강렬한 문장이 어울릴 만했습니다. 제국주의와 식민지배가 구시대 단어로 여겨지는 21세기이지만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는 여전히 영국과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 16개 국가의 수장입니다. 영국 식민지였던 국가들이 모여 만든 영연방의 회원국은 54개국입니다. 영국의 위상과 왕실의 위세는 예전만 못 해도 여왕(왕)의 상징성은 여전합니다. 해리 왕자와 매건 마클 부부가 최근 왕실을 비판했을 때 사람들의 시선이 쏠린 이유도 이런 상징성과 무관치 않을 겁니다.
지난 9일(현지시간)엔 엘리자베스 2세의 부군 필립 공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17일엔 장례식이 열렸습니다. 해리 왕자 부부의 떠들썩했던 인터뷰에 이어 그의 죽음으로 영국 왕실이 다시 주목 받고 있는데요. 오늘은 TV시리즈 ‘더 크라운’을 통해 영국 왕실을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드라마에는 필립 공의 삶이 꽤 상세히 묘사됩니다. 필립 공은 그리스와 덴마크 왕자였습니다. 휘황한 가문이었지만 필립 공의 어린 시절은 불우했습니다. 가족이 군부 쿠데타로 그리스에서 쫓겨나면서 해외를 떠돌아야 했습니다. 그는 모계 혈통인 영국에 정착한 후 스코틀랜드의 기숙학교 고든스타운에서 학창시절을 보냈습니다. 누나 넷 모두 나치 당원인 독일 남성들과 결혼해 나치와 가깝다는 오해에 시달렸습니다. 만삭인 누나 세실과 매형이 비행기 추락사고로 숨지는 슬픔을 겪기도 했습니다. 어머니는 정신병원에 갇혀있어 대면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10대로선 감당키 어려운 시련을 잇달아 겪었던 거죠.
드라마에선 어린 필립의 성정이 드러나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필립은 학교 급우와 싸웠다가 벌칙으로 교문을 혼자 만들게 됩니다. 필립이 비를 맞으면서도 고집스레 홀로 돌을 쌓아가며 작업하는 장면에서 그의 성격이 어떻게 형성됐는지 가늠할 수 있습니다.
왕족으로 태어나 스스로 삶을 개척해야 했던 필립 공은 큰아들 찰스에게 엄격했습니다. 자신이 심신을 수련했던 고든스타운에 찰스를 입학시키기도 했습니다. 아버지와 달리 찰스는 유약했고, 그런 아들을 보며 필립 공은 실망이 컸습니다. 장차 왕이 될 아들에 대한 걱정이 많이 작용했을 겁니다. 가부장적인 필립 공은 아내 엘리자베스 2세를 충실히 따라야 하는 상황에 대한 불만을 아들을 통해 해소하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위압적인 아버지 때문에 주눅이 들었는지 찰스는 어린 시절 말을 더듬었습니다. 찰스가 오랜 연인이었던 유부녀 카밀라 파커불스와 잠시 절연하고 다이애나 스펜서와 교제하다 결혼하게 된 과정에도 아버지의 그림자가 드리웠습니다. 필립 공은 총명하고도 대담한 다이애나를 첫 만남부터 마음에 들어 했습니다. 아버지 눈치를 살피던 찰스는 ‘왕실의 평화’를 위한 현실적인 배우자로 다이애나를 택합니다.
필립 공은 1952년 아내가 왕위에 오른 후 69년 동안 여왕의 남자로 충성을 다한 것처럼 보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해군 지휘관 경력이 단절된데 따른 상실감 등으로 여왕과 갈등을 빚었습니다. 초기엔 왕실 내에서 별다른 결정권을 가지지 못한 현실에 강한 불만을 제기하기도 했습니다. 1960년대엔 간첩사건에 휘말려 곤욕을 치렀습니다. 아시아계 발레리나와 은밀한 관계를 맺기도 했고요. 1956년 멜버른 올림픽을 맞아 해군을 이끌고 영연방 국가 순방에 나섰다가 성추문 의혹이 보도돼 아내와 불화하기도 했습니다.
필립 공을 둘러싼 불미스러운 일은 약과였습니다. 영국 왕실은 오래 전부터 스캔들 제조기였습니다. 왕실을 뛰쳐나온 해리 왕자와 마클 부부의 언행은 비교할 수도 없는 엄청난 일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엘리자베스 2세의 큰아버지 에드워드 8세는 사랑을 위해 1936년 왕위에서 물러나 세상을 놀라게 했습니다.
에드워드 8세는 두 차례 이혼한 심프슨 부인과 사랑에 빠졌습니다. 당시 보수적인 영국 사회는 왕과 이혼녀의 결혼을 강력 반대했습니다. 정치권까지 나서 두 사람의 혼인을 막았습니다. 왕관이냐, 결혼반지냐는 택일의 기로에서 에드워드 8세는 사랑을 택합니다. 그가 물러난 후 동생이 왕위를 물려받으며 조지 6세가 됩니다. 그의 큰딸 엘리자베스 2세는 왕위 계승 서열 1위에 오르게 되고요.
생각지도 않게 왕위에 오른 조지 6세는 격무와 스트레스에 시달리다 57세에 짧은 생을 마감했습니다. 엘리자베스 2세가 퇴위 후 윈저 공이 된 큰아버지를 좋게 볼 리가 없습니다. 사랑을 한답시고 무책임하게 ‘가업’을 동생에게 떠맡겼다는 생각이 들었을 테니까요. 게다가 윈저 공이 2차 세계대전 중 나치와 손잡고 왕좌 복귀를 시도했다는 비밀문서가 공개된 점도 마음에 걸렸을 겁니다.
여왕의 동생 마거릿 공주 역시 매스미디어의 좋은 사냥감이었습니다. 마거릿 공주는 왕실에서 오래 일한 공군 대위 피터 타운센드와 사랑에 빠져 결혼을 약속하는데요, 불행하게도 타운센드는 유부남이었습니다. 영국 국교인 성공회 사제단과 정치권의 반대에 부딪혀 마거릿 공주의 사랑은 혼인으로 이어지지 못합니다. 마거릿 공주는 언니의 그늘 아래에선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자괴감에 술을 탐닉하고, 정원사와 불륜 행각을 벌이기도 합니다. 왕실의 골칫거리였는데, 찰스 왕세자가 결혼하면서 매스컴의 초점은 옮겨가게 됩니다.
드라마를 보다 보면 영국 왕실에서 스캔들이 왜 끊이지 않는지 어느 정도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왕실의 삶은 화려하지만 제약이 많습니다. 모든 영광이 만인지상의 한 사람에게 향하는 상황에서 주변사람들은 주변인으로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억눌린 삶에서 탈출하고 싶은 욕망이 작동 할 만도 합니다.
여왕의 삶 역시 고단합니다. 어떤 말을 하거나 행동을 할 때 여론을 살펴야 하고, 정치권의 눈치를 봐야 하며 배우자의 심기를 고려해야 합니다. 아내와 엄마, 언니라는 사적 위치보다 여왕이라는 공적 자리를 더 우선하면서 벌어지는 갈등과 고뇌를 감수해내야 합니다. 엘리자베스 2세는 큰아버지의 퇴위를 돌아보며 왕실과 국가에 대해 더 큰 책임감을 느꼈을 지 모릅니다. 왕좌(Crown)에 있는 동안 군주정부(Crown)를 온전히 지키면서 왕관(Crown)의 무게를 견뎌내야 하는 것은 오롯이 여왕의 몫입니다.
‘왕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Kings reign but do not govern).’ 영국 입헌군주제를 응축해 표현한 말입니다. 왕은 상징적인 존재에 불과하고 실권은 없는 현실을 담았습니다. 영국 왕은 통치하지 않으면서도 국가의 구심점 역할을 했습니다. 옛 것을 중시하는 영국인들에게는 ‘군림하는 왕’의 의미가 남달랐습니다. 하지만 21세기에도 왕실의 존재 이유가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시대에 발맞추려는 여러 노력에도 불구하고 권위와 전통 의식에 갇혀 스캔들 제조기의 자리에만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닐까요. 필립 공의 죽음과 장례식은 이제는 ‘해가 지는 나라’ 영국의 현재와 왕실의 존재 의미를 새삼 생각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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