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이 지나서도 세월호 타령하냐' 하는 사람들, 여기 와서 보면 그런 말 할 수 있을까요."
텅 빈 고등학교 교실에 두 명의 대학생이 들어섰다. 교복이 아닌 베이지색 코트와 청바지를 입은 모습이 배경과 어울리지 않았다. 이들은 교실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잠시 걸음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책상 위에 올려진 수첩에 글을 남기기도 했다.
언뜻 보면 평범한 교실처럼 보이는 이곳은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학생들의 교실을 보존한 '4·16기억교실'이다.
이날 기억교실을 방문한 대학생 김노영(21)씨와 조아영(20)씨는 "책상을 보면 몇 군데만 사진이나 편지가 없다. 그분들만 생존자라는 얘기"라며 "그걸 보니 얼마나 많은 학생이 희생됐는지 더욱 실감이 난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각 반의 교실에는 20여 개의 책상 중 10개 이상 사진과 꽃이 놓여 있었다. 빈 교실 안, 주인 잃은 물건들의 모습이 쓸쓸해 보였다.
교실의 시간은 2014년 4월 16일, 그날에 멈춰 있었다. 칠판 옆에는 2014년 4월의 식단표와 공지사항이 붙어 있었다. 희생된 학생들과 불과 한 살 차이인 인턴기자들도 그날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세월호 참사가 어느덧 7주기를 맞았다. 다시 돌아온 4월의 아픈 기억 너머 희생된 아이들이 머물던 공간을 그대로 재현해 놓은 '4·16기억교실'을 찾아가 봤다. 이곳은 12일 안산 단원구 고잔동에 문을 연 '4·16민주시민교육원' 안에 있다.
4·16민주시민교육원은 ①단원고에서 희생자 학생들이 머물던 교실 10칸의 모습을 옮긴 '단원고 4·16기억교실' ②학생 및 단체 등을 대상으로 교육을 진행하는 '미래희망관' 등 두 개의 건물이 마주보고 있다.
4·16기억교실이 이곳으로 오기까지 5년 동안 3번의 이사를 했다. 그만큼 험난한 과정이 있었다.
2014년 4월 참사 이후 '단원고 존치교실', '기억교실' 등으로 불리던 단원고 내 희생자들이 생활했던 교실 10칸은 2016년 8월 경기 안산교육지원청 별관으로 임시 이전했다.
같은 해 11월에는 '단원고 4·16기억교실'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2018년 8월 경기 안산교육지원청 본관으로 옮긴 뒤, 지금의 4·16기억교실이 완성됐다.
1층에 들어서면 발열 검사를 한 후 간단한 안내를 받는다. 방문객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서약서에 동의해야 한다. 서약서의 내용은 ①사진 본래 용도 외에는 사용 금지 ②사진 사용 후 폐기 ③책걸상 등 기록물에는 기대거나 물건을 올려놓지 않기 ④학생들 이름이나 얼굴 식별 가능한 사진 쓰지 않기 등이다.
한 층 올라가면 4·16기억교실이 나온다. 2층에는 2학년 7반부터 10반, 3층에는 1반부터 6반 교실이 이어져 있다. 복도부터 단원고의 실제 구조를 그대로 옮겨놓은 모습이다. 벽에 있는 붉은 벽돌과 교실 문 위에 걸려 있는 명패까지 단원고에서 실제로 가져왔다고 한다. 단원고 2학년 교실을 고스란히 담기 위해 책걸상은 물론 문틀, 창틀까지 원래의 것을 옮겨놨다고 한다.
이날 기억교실을 방문한 단원고 학부모 박모(53)씨는 "실제 단원고에 온 기분이다. 너무 똑같아서 가슴이 철렁할 정도"라고 말했다.
텅 빈 교실, 희생 학생들의 책상에는 사진과 유품, 추모객들을 위한 방명록이 놓여있었다. 2학년 9반의 한 책상 위에는 희생 학생의 생전 모습이 담긴 액자 세 개와 화분, 수첩 여러 개가 놓여 있었다. 또 다른 교실의 책상 위에 놓인 요리사 인형이 눈에 띄었다.
책상에는 공통적으로 두 가지 방명록이 놓여 있다. 서랍 안에는 지금의 자리로 오기 전부터 쓰였던 방명록이 있고, 책상 위의 것은 4·16기억저장소에 새로 만들어진 것이다. 방명록을 열어보니 유가족과 친구들, 일반 시민들이 쓴 추모글이 있었다.
대학생 이모(23)씨는 2학년 8반 교실을 한참 동안 떠나지 못했다. 안산의 한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씨는 세월호 참사로 친한 친구와 갑작스런 이별을 해야 했다. 그는 친구의 책상에 앉아 한참 동안 편지를 썼다. 일찍 하늘로 간 친구 생각에 입을 막고 숨죽여 울었다.
이씨는 "해마다 이맘때면 떠난 친구를 보러 온다"고 했다. 4·16기억교실이 이곳으로 오기 전부터 4월이 되면 희생된 학생들을 추모하기 위해 단원고와 임시 이전 교실을 찾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새롭게 둥지를 튼 4·16기억교실을 찾은 감회는 남달랐다.
그는 "(참사 뒤) 단원고에 교실이 남아 있을 때 간 적도 있다"며 "4·16기억교실이 단원고의 모습과 너무 비슷하다"고 말했다. 7년이 지난 지금 이씨는 대학생이 됐지만 친구들은 교실과 함께 그때 그 모습 그대로 남아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이곳을 찾은 또 다른 방문객 박모(52)씨는 현재 단원고에 다니는 1학년 자녀를 둔 학부모다.
박씨는 자신이 "세월호 참사부터 이 4·16기억교실이 만들어지기까지 과정을 관심을 갖고 지켜봤다"며 잠시 울컥하다 말을 이어갔다. 특히 그는 "아이들에 대한 미안함을 조금이나마 던 것 같다"고 말했다. 학부모로서 4·16기억교실이 이리저리 옮겨다니는 것을 보며 마음이 아팠기 때문이다.
한편 2학년 9반 교실에서 희생자 고 김혜선양의 어머니 성시경씨를 만났다. 그는 유족으로서 세월호 참사 이후 유류품 보존, 기억교실 이전 작업 등에 참여했다.
세월호가 정박해 있는 목포 신항에서는 4·16기억저장소에서 활동하고 있는 5명의 희생자 어머니들과 함께 학생들의 유류품 보존 작업을 했다.
유류품을 씻고 보관하는 데 보름이 넘는 시간이 걸렸는데, 특수 세제를 이용해서 며칠씩 씻고 또 씻는 작업을 되풀이했다. 그렇게 깨끗하게 씻긴 유류품 한 점 한 점은 보존 작업을 거쳐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다.
지금은 4·16기억교실에서 방문객 안내를 맡고 있다. 딸은 없지만 딸이 공부하고 친구들과 생활했던 그 공간에서 방문객을 맞는 것을 두고 "처음 2, 3년은 안내하다가도 펑펑 울었다"고 말했다.
그러다가도 "당사자 가족이 직접 설명해주는게 좋다고 생각했다"며 "아이들의 억울한 죽음이 묻히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용기 내서 하게 됐다"고 심경을 전했다.
성씨는 4·16기억교실을 두고 "단순히 추모 공간으로만 끝날 게 아니라 생명과 안전의 중요성을 생각할 수 있는 곳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