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거하던 남자친구가 어느 날 실종된다. 회사의 천재들만 들어갈 수 있다는 특별 연구소로 출근한 지 얼마 안 돼서다. 남자친구는 며칠 뒤 회사 안에서 시신으로 발견된다. 폐쇄회로(CC)TV 영상에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래도 의문은 해소되지 않는다. 되려 물음표는 더욱 커진다.
릴리(소노야 미즈노)와 세르게이(칼 글루스맨)는 남부럽지 않은 사내 커플이었다. 샌프란시스코의 근사한 아파트에서 함께 살고 있었다. 둘이 다니던 어마야는 실리콘밸리 최고 IT기업이다. 양자역학컴퓨터로 세계 컴퓨터 시장을 장악하며 막대한 부를 쌓았다.
세르게이가 사라진 것도 이상했지만 스스로 죽음을 택한 것도 의문이었다. 세르게이는 딱히 고민거리가 없었고, 심신은 건강했다.
슬픔에 빠진 릴리는 세르게이에 대해 자신이 모르는 점이 많다는 걸 자각한다. 전 남자친구의 도움을 받아 세르게이의 휴대폰을 해킹한 후 정체 모를 한 사내의 존재를 알게 된다. 비밀리에 만난 사내는 세르게이가 러시아 정부가 특파한 산업스파이였다고 밝힌다. 어마야의 매우 특별한 정보를 훔치려다 들켜서 살해됐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릴리는 사내의 주장을 믿을 수 없으면서도 세르게이의 죽음을 둘러싼 비밀을 추적한다.
세르게이가 출근했던 연구소는 데브스다. 어마야의 설립자이자 최고경영책임자(CEO)인 포리스트(닉 오퍼) 등 극소수 임원과 연구원만 연구소의 정체를 안다. 릴리는 데브스가 세르게이의 죽음과 밀접히 연관돼 있다고 믿는다.
데브스의 정체를 조금씩 파악하면서 릴리는 믿을 수 없는 사실을 알게 된다. 데브스에선 영상으로 과거와 미래를 볼 수 있는 특수한 실험을 하고 있었다. 실험이 어느 정도 성공했는지 알 수 없는데, 묘하게도 포리스트는 릴리의 행동을 꿰뚫어 보는 듯한 말을 하곤 한다. 포리스트는 세르게이의 행동을 미리 내다보고선 함정을 판 것일까. 그렇다면 왜 세르게이는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일까.
포리스트는 마음의 상처가 크다. 사업이 성공하기 전 교통사고로 어린 딸을 잃었다. 어마야는 딸의 이름이다. 포리스트는 과거에 집착한다. 마르고 닳지 않을 부를 쌓았지만 사는 집은 그대로다. 낡은 차를 바꾸지 않고 탄다. 가족과 행복했던 시간을 간직하기 위해서다.
포리스트가 연구소 데브스를 세운 이유도 딸과의 재회를 위해서다. 단란했던 과거를 영상으로 복원하기 위해 천재들을 모으고, 돈을 쏟아 부었다. 그리고 그는 미래까지 보려 한다. 신과 같은 위치에 올라서기 위해서다. 데브스는 원래 ‘데우스’로 신을 의미한다. 슬픔에서 비롯된 포리스트의 욕망은 릴리의 삶을 위협한다. 릴리는 포리스트에 맞서 싸울 방법을 찾는다.
※권장지수: ★★★☆(★ 5개 만점, ☆은 반개)
알렉스 가랜드 감독이 각본을 쓰고 연출까지 맡았다. 가랜드 감독은 영화 ‘엑스 마키나’(2014)와 ‘서던 리치: 소멸의 땅’(2018)로 암울하면서도 기이한 세계를 펼쳐냈다. 두 영화 다 인간 존재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데, ‘데브스’ 역시 마찬가지다. 만약 인간이 첨단기술의 도움으로 미래를 볼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미래를 예측할 수 있으니 적극적으로 대응에 나설까. 어차피 미래는 결정된 것이니 굳이 인위적인 행동이 필요한 걸까. 그렇다면 굳이 미래를 볼 필요가 있을까. 여러 질문을 던지며 가랜드 감독은 기술 발달이 우리를 유토피아가 아닌 디스토피아를 이끌지 모른다고 주장한다. SF와 스릴러를 교직해 철학적 질문을 던지며 서스펜스를 빚어내는 연출력이 빼어나다.
※로튼토마토 신선도 지수: 평론가 81%, 시청자 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