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준국어대사전은 ‘고성’을 ‘옛날에 지은 오래된 성’이라 정의한다. 사전 속 고성은 무미건조하다. 덧붙이면 좋겠다. ‘과거를 고스란히 품고 지금도 사람이 살아가는 공간’이라 하면 훨씬 포근한 느낌이다. 언덕 위에 뾰족하게 솟은 유럽의 고성과 달리 중국 고성에는 서민의 애환이 녹아있다. 대체로 관청이 있고, 서민을 위로한 신앙이 곁을 지켰으며 풍물이 발달했다. 엄청나게 많기도 하다. 4대 고성, 8대 고성이라 자랑하는 곳만 찾아가려 해도 하나의 동선, 한 번의 여행으로는 불가능하다. 가장 완벽한 고성 하나를 꼽으라면, 찰나의 망성임도 필요 없다. 1997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핑야오고성(平遥古城)으로 간다.
지금은 ‘가난한’ 산시성이지만 핑야오고성은 예로부터 현(县)의 치소였다. 명나라가 건국과 함께 성벽을 확장했으며 청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600년 세월을 풍미했다. 정사각형에 가까운 성벽 둘레는 6㎞가 넘는다. 고성으로 누구나 쉽게 들락날락한다. 속살을 관람하려면 입장권을 사야 한다. 옛날에 구입한 입장권을 찾아보니 구멍이 10개나 뚫려 있다. 이틀 동안 관람한 흔적이다. 종횡으로 뻗은 동서남북 사대가(四大街)가 있고 72갈래나 되는 골목이 꼬불꼬불 연결돼 있다. 잘 찾아다니려면 지도를 펼치고 작전을 짜야 할 정도다.
동남쪽에 성황묘(城隍庙)와 문묘(文庙)가 마주 보고 있다. 성황은 성곽과 해자를 수호하는 신이다. 민간신앙과 도교에서 모두 중시하며 제법 큰 고성이라면 꼭 사당이 있다. 산문의 글자가 얼핏 부호처럼 보인다. 감입(敢入)이다. 용감하게 들어오라는 듯, '입(入)' 자가 마치 칼처럼 예리하다. 문이 좁아 감히 들어올 수 있는지 묻는 듯하다. 안으로 들어서면 헌전(献殿)이다. 향을 피우고 제례하는 장소다.
헌전을 지나 성황전으로 가는 길에 관아에나 있을 법한 회피(迴避)와 숙정(肃静) 팻말이 있다. 공정히 판정하니 조용히 하라는 의미다. 현우백(显佑伯)과 영응부(灵应府) 깃발이 낯설다. 명나라 개국 황제 주원장은 전국 현 단위 성황에게 4품 작위인 현우백을 하사했다. 신에 대한 봉호 수여는 곧 백성에 대한 위무다. 성황묘의 위상과도 무관하지 않다. 영응부는 성황의 찬란한 능력을 상징한다. 듣지 않아도 영혼의 소리를 감지하고 보지 않아도 무엇을 원하는지 볼 수 있는 성황이 백성의 고충을 해결한다. 어찌 사람들이 찾지 않을 것인가?
가장 안쪽은 성황의 침궁이다. 녹색ㆍ황색 기와와 홍등이 어울린 2층 전각이다. 철로 만든 향로의 보정(宝顶) 끝이 향한 지붕에 꼬마 전각이 앙증맞다. 침궁 주위에 진무루(真武楼), 재신전(财神殿), 토지전(土地殿)도 등장한다. 불의 신을 위한 조군전(灶君殿), 고성 공사에 기여한 인물을 봉공한 기공사(冀公祠), 역귀를 몰아내는 신 종규전(钟馗殿)도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길 건너에 문묘가 있다. 당나라 태종 시대 처음 세워졌으며 서원과 사당이 함께 있는 학궁(学宫)이다. 명나라 이후 관우를 숭상하는 관제묘를 무묘(武庙)라 부르면서, 공자 사당인 공묘를 자연스레 문묘라 부르기 시작했다. 공묘가 아닌 문묘가 전국에 꽤 많다. 문묘와 무묘가 나란히 있는 지방도 있다. 서원이 있던 자리에 경일정(敬一亭)이 나타난다. 한나라 회남왕 유안이 저술한 ‘회남자’에 일야자(一也者), 하나가 곧 만물의 근본이며 최고의 도라는 말이 있다. 경일정은 그 ‘하나’가 무엇인지, 근본 가치에 대한 찬사가 담긴 말로 제천 행사를 열던 장소다.
건물 모습을 보면 정자보다는 당(堂)이라 해야 어울린다. 1943년 일본군이 핑야오를 침공해 문묘가 상당히 훼손된 후 다시 복구하면서도 정(亭)을 유지했다. 지방지인 분주부지(汾州府志)에 따르면 제천 행사를 위해 처음 건축한 후 명나라 가정제가 썼다고 한다. 속마음까지 기재하지 않았으니 왜 그랬는지 알 수 없는 비밀이다. 거대한 솥 양쪽에 제천첨명방(祭天签名榜) 담장이 있다. 위로는 황제부터 아래로는 백성까지 제례에 참여한 자는 누구나 서명을 할 수 있다. 나라와 가정이 편안하기 바라는 마음이다.
강당이며 교실이던 명륜당에 공자행교도(孔子行教图)가 보인다. 당나라 화가 오도자의 솜씨는 전국의 공자 사당을 빛내고 있다. 일이관지(一以贯之)라 쓴 편액 아래에 있으니 더욱더 그렇다. ‘논어’ 이인(里仁) 편에 나오는 일화다. 제자가 스승의 뛰어난 학식에 감탄하자 ‘하나로 꿸 뿐이다’라고 대답한다. 하나의 이치를 깨달으면 세상 모든 일을 꿰뚫는다는 뜻이다. 공자의 말이 그대로 찬양이 됐다. 대성전으로 들어서니 ‘영원한 스승’인 만세사표 위쪽에 있는 덕제도재(德齐帱载)가 눈에 들어온다. 휘장인 주(帱)는 ‘덮을 도’로 읽는다. 청나라 함풍제의 공자 예찬으로 중용이 출처다. ‘덕으로 온 세상을 고루 덮는다’는 말이다.
고성 북동쪽에 도교 사원인 청허관(清虚观)이 있다. 입구의 태평흥국관(太平兴国观) 편액은 송나라 시대 이름이다. 당나라 고종 시대 처음 건축했을 때는 태평관이었고, 지금의 청허관은 청나라 시대부터 불린 이름이다. 도관에 빠지지 않는 삼청전과 옥황각도 있지만, 순양궁(纯阳宫)이 정전이다. 당나라 시대 도사인 여동빈을 봉공한다. 중국 도교의 양대 산맥인 전진도(全真道)의 조사로, 도호(道号)가 순양자(纯阳子)다. 본명은 여암으로 고향은 산시성 남부 루이청(芮城)이다. 관우의 고향과도 아주 가깝다. 다른 성에 비해 산시에 순양궁이 많은 편이다.
고성 서남쪽에 현아(县衙)가 있다. 대문을 지나 ‘예의의 문’인 의문(仪门) 벽에 공생명(公生明)과 염생위(廉生威)가 적혀 있다. 명나라 시대부터 관리의 좌우명이었다. 순무를 역임한 연부가 쓴 관잠(官箴ㆍ지방 관리가 행정에 필요한 지식과 자세에 대해 기록한 책)에 나오는 말이다. 관리들은 앞다퉈 관아에 비석으로 새겨 공정과 청렴의 자세를 다잡았다. 정치인이 입버릇처럼 되새기며 실천을 종용했다. 시진핑 주석은 반부패를 메시지에 활용했다. 고위 공직자에 대한 강력한 사법 집행을 시작하며 공식 석상에서 내뱉은 말이다. ‘관리는 권력이 아닌 청렴에 두려워하며, 백성은 능력이 아닌 공정에 복종한다’는 뜻이다. 바람직한 ‘공자님 말씀’ 같으면서도 소름 끼칠 정도로 무서운 말이다. 직위가 높을수록 훨씬 강력하다.
오른쪽으로 가면 인문(人门), 왼쪽으로 가면 귀문(鬼门)이다. 오른쪽으로 토지신 사당과 재상 소하를 봉공하는 찬후묘(酂侯庙)가 있다. 사당 앞에 헌정(献亭)이 있다. 찬후 작위를 하사한 유방과 죽간을 들고 있는 소하, 검을 잡고 있는 한신이 앉았다. 토지와 재상은 사람을 살리는데 기여한다는 뜻인가? 왼쪽으로는 뇌옥(牢狱)이다. 죄수를 가두는 방과 도망가지 못하도록 발을 묶는 기구도 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을 했던 원혼이 들리는 듯하다. 친민당(亲民堂)에서 판결을 한다. 죄지은 자는 감옥으로 가고 누명을 벗은 자는 사당으로 가서 향불을 피우고 돌아가지 않았을까? 현아 뒤쪽은 관리의 숙소이며 후원도 있다.
현아를 나와 북쪽으로 천천히 10분정도 걸어가면 서유성객잔(西裕成客栈)과 일승창(日升昌)이 나란히 있다. 중국 최초의 근대적 은행인 표호(票号)가 있던 자리다. 도료 가게인 서유성의 주인 이대전이 친구와 함께 시장에 갔다. 친구는 유명한 점쟁이였다. 한 젊은이를 유심히 바라보더니 ‘저 젊은이를 수하로 두면 큰 돈을 벌게 되리라’고 권유했다. 때를 만나지 못했으나 몸짓이나 관상을 보니 금맥이 보인다고 말했다. 이대전은 곧장 그를 수하로 거두었다. 얼마 후 표호를 설립하고 젊은이를 총괄 사장으로 삼았으니, 그가 바로 뇌리태다.
1823년 일승창을 열자 대박이 났다. 전국 35개 지역에 분점을 냈으며 러시아와 몽골에 대리점도 생겼다. 은이나 금, 원보를 직접 이송하던 시대가 끝났다. 환어음을 발행하니 너도나도 이용했다. 100년 가까이 ‘천하제일’의 자부심을 지켰다. 뇌리태는 타고난 전문 경영인이었다. 표호는 오늘날 주식회사와 비슷했다. 지분도 배당도 있었다. 자본을 가진 상인을 차이둥(财东)이라 하고 자본을 출자한 이사장을 둥자(东家)라 했다. 오행의 동쪽에 자본의 근원인 나무 목(木)이 위치한다. 사장은 장구이(掌柜ㆍ장궤)다. 큰 조직은 다장구이, 얼장구이, 싼장구이로 서열이 층층이다. 중국인 또는 자장면을 속되게 이르는 ‘짱깨’라는 말이 바로 장구이에서 유래됐다. 일승창 장구이가 머물던 방에 무수히 떨어진 동전이나 지전은 사람들의 간절한 소원이 쌓인 듯하다. 일승창의 성공으로 너도나도 표호를 세웠다. 1849년 다장구이 뇌리태가 사망하자 경쟁은 더욱 치열했다.
그야말로 표호 박람회다. 길을 걸으면서 ‘또 표호가 있구나’ 반복해야 한다. 울성장(蔚盛长)을 만든 물주는 후음창이다. 소액 주주들과 함께 표호를 다섯 개나 설립했다. 당시도 ‘돈 놓고 돈 먹기’였다. 울태후, 울풍후, 신태후, 천성형까지 합해 오련호(五联号)라 부른다. 일승창의 뇌리태가 병환으로 요양하는 틈에 모홍홰가 다장구이가 되고자 술수를 부렸다. 그러나 실패했다. 모홍홰가 사직했다는 말을 듣자마자 후음창이 표호를 설립하고 그를 스카우트했다. 길거리 강아지보다 많은 표호 중에 울성장이 1900년에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다.
서태후와 광서제 덕분이다. 서양 8개 연합군의 베이징 침공으로 시안까지 도피하는 중에 수많은 상인에게 민폐를 끼쳤다. 당시 진상의 중심이던 핑야오에서 어디에 거처를 정할지 초미의 관심사였다. 울성장이 간택됐다. 붓을 들고 염주를 목에 건 광서제가 앉아 있다. 능력 있는 인재를 임용한다는 현거능인(贤举能任)이 적힌 용좌가 당도했으니 가문의 영광이었다. 광서제가 추진한 무술변법(戊戌变法)은 서태후의 반대로 실패했다. 뒷면에 변법 실패 후 사형당한 담사동과 일본으로 도주한 양계초, 강유위 사진이 있다. 사람들이 광서객잔이라 불렀다. 물론 청나라가 멸망한 이후 일이다.
표호와 함께 표국(镖局)도 고성을 풍요롭게 하는 역사 문화다. 운송을 전문으로 하는 조직이자 사업이다. 상품, 물건, 금괴, 사람 등 무엇이라도 지정된 장소로 안전하게 옮겨준다. 상업이 발달하자 덩달아 성행했다. 처음에 표국은 반청복명을 위해 사상가 고염무가 만든 무장 조직이었다. 사업의 성격을 지닌 최초의 표국은 흥융표국(兴隆镖局)이다. 산시 출신으로 청나라 건륭제의 무술 사부인 장흑오가 베이징에서 창업했다. 강호에서 화북삼걸로 유명한 왕정청이 1855년 고향 핑야오에 동흥공(同兴公) 표국을 세웠다. 남대가(南大街) 중간에 위치한다. 안으로 들어서니 손으로 던지는 표창이란 뜻의 ‘표(镖) 자’가 선명하다. 운송 수단에 깃발이 걸렸고 무기도 꽂혀 있다.
호송한다는 뜻인 보표(保镖)는 경호원을 지칭하기도 한다. 우두머리는 표두(镖头)다. 물건이나 사람을 노리는 산적이 많아 상당한 수준의 무술을 익혀야 업무에 투입된다. 충(忠)과 의(義)가 큼지막하게 적힌 훈련장에서 평소에 내공을 길렀다. 1900년 서태후의 피난길에 은 93만 냥을 시안까지 운송하는 업무가 생겼다. 황실 재산의 운송이라 아무도 나서질 않았다. 결국 동흥공 표국이 일을 맡았고 한치의 실수도 없이 정해진 날짜에 임무를 완수했다. 서태후로부터 봉지의서(奉旨议叙) 편액을 받았다. 서태후에 의한 가문의 영광이 또 있었으니 화북제일표국의 명성이 뒤따랐다.
남대가에서 고성 중심으로 걸어가면 삼중 처마 누각인 시루(市楼)가 나타난다. 18.5m에 이르고 따로 입장권을 사야 올라갈 수 있다. 1688년 청나라 강희제 시대부터 보수했다고 하니 꽤 오래됐다. 2012년 10월 국경절 연휴에 핑야오를 찾았다. 엄청나게 많은 관광객이 몰려 발 디딜 틈도 없는 거리를 지나 어렵사리 누각에 올랐다. 고성이 한눈에 보였다. 나무와 벽돌로 만든 누각이라 약간 불안했다. 성 중점 문물로 보호하는데 지금도 올라갈 수 있는지 모르겠다. 시루는 정기적으로 시장이 열리는 장소에 설치한다. ‘도시’가 아닌 ‘시장’의 누각이다. 시장 관리 책임자가 질서를 살피기 위해 바라보는 장소였다.
고성에 독특한 문양이 있어 눈길을 끈다. 꽃과 매듭이 둘러싸고 가운데에 글자가 적혀 있다. 4개의 글자가 하나로 합쳐졌다. 초재진보(招财进宝)라 읽는다. ‘부자 되세요’라는 덕담이다. 원나라 시대 유당경이 쓴 잡극(杂剧)인 ‘강상침(降桑椹)’에 나오는 말이다. 24가지 효도인 이십사효(二十四孝) 중 오디를 주워 노모에게 바친 채순의 이야기다. 재물과 보물, 모으는 일(招)과 집에 들이는 일(进)을 하나로 합체했다. 글자는 서로 긴밀하게 공유한다. 왼쪽의 재(财), 오른쪽에 초(招)가 재(才)를 함께 사용한다. 패(贝)도 보(宝)와 재(财)의 공통분모다. 진상의 땅이 만든 발상이다.
밤이 되니 고성은 일제히 불을 밝힌다. 홍등 덕분에 밤길도 걷기 좋다. 고성 어디서라도 볼 수 있도록 시루도 낮과 사뭇 다르다. 마실 나와 돌아다니다가 붉은 누각을 따라가면 길 잃을 염려는 없다. 표호와 표국은 객잔으로 변모했다. 핑야오를 다섯 번 찾았어도 많은 인원과 동행하니 늘 고성 밖에서 숙박했다. 천원규(天元奎) 객잔에서 하루를 보낸 적이 있다. 4성급 호텔이면서도 저렴하다. 무엇보다 고성 중심인 시루 바로 옆이다. 1791년에 처음 지은 건물로 2000년에 리모델링했다. 옛날 품격을 간직하면서도 편리한 호텔 분위기다. 개미만큼 객잔이 많다. 고르고 골라, 가성비 높은 꿈나라로 갈 수 있다. 고성이 선사하는 행복의 나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