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인 인권운동의 백인 순교자

입력
2021.04.07 04:30
26면
4.7 브루스 클런더

미국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시 '시민권기념관(Civil Rights Memorial)'에는 1950, 60년대 흑인 인권운동에 목숨을 바친 41명의 이름이 대리석 명판에 새겨져 있다. 유권자 등록을 한 '죄'로 1955년 살해당한 미시시피주 험프리 카운티 목사 조지 리(George Lee)부터 1968년의 마틴 루터 킹 목사까지 주로 흑인인 그들 사이에 드문 백인으로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 장로교 목사 브루스 W. 클런더(Bruce W. Klunder, 1937~1964)가 자리잡고 있다. 그는 시 교육위원회의 흑백 분리 차별에 반대하다 흑인학교 건설 현장에서 불도저에 깔려 숨졌다.

전후 클리블랜드시 흑인 인구는 동부지역을 중심으로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1960년대 초 흑인 유치원과 초등학교는 과밀 2부제로 운영된 반면, 백인 학교는 입학생 미달로 빈 자리가 즐비했다. 흑인 학부모들은 교육위원회의 분리 정책에 반발하며 빈 교실을 채우라고 요구했다. 시교육위는 흑인은 백인과 몸이 닿을 수 있는 체육수업에 참여할 수 없고, 식당도 이용할 수 없고, 화장실은 하루 한 번만 이용해야 한다는 단서를 달아, 제한적으로 흑인 학생의 입학을 허용했다.

지역 인종평등회의(CORE) 등 인권단체들이 반발했고, 한편에서는 분노한 백인들이 1964년 1월 폭동을 일으키기도 했다. 급기야 교육위는 동부지역 흑인 학교 신설이라는 새로운 대책을 내놨지만, 그 역시 분리차별의 강화였다.

두 아이의 아버지이자 CORE 지부장이던 만 26세의 백인 목사 클런더는 건설 현장의 불도저 앞에 드러누웠다. 그가 숨진 뒤 시위는 더 격해졌지만, 학교(Stephen E. Howe School)는 지어졌다. 흑인 주민들에게, 미국 흑인들에게 그 학교는 클런더 목사의 슬픈 비석 같은 존재였다. 학교는 주민 수 감소로 2005년 폐교됐고, 2013년 헐려 잔디밭이 됐다. 하지만 주민들의 청에 따라 시설 일부는 클런더의 흔적으로 남겼다.

최윤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