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년 전, 그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나는 1년 남짓 이어온 신경외과 전공의 생활을 중단하고 방황하고 있었다. 물론 그럴 만한 사연이 있었다.
바로 직전 연말, 나는 30대 남성의 주치의를 맡고 있었다. 유전성으로 발생한 다발성 뇌혈관종 환자로 애초 완치는 불가능했다. 이 방면 권위자라던 담당 교수는 치료방법을 선뜻 정하지 못하고 차일피일 미루기만 했다. 입원 일주일이 지나서야 뇌압을 낮추는 간단한 수술을 결정했다. 환자의 의식은 명료했고 다른 문제도 없었다. 그런데 수술 당일 새벽, 환자가 갑자기 혼수상태에 빠졌고, 중환자실 집중치료에도 불구하고 이틀 만에 사망했다. 사인은 혈관종 파열에 의한 뇌출혈로 추정됐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가장 만만해 보여서였을까. 이상하게도 유가족들의 분노는 나로 향했다. 환자를 중환자실로 옮긴 후부터 나를 보는 눈초리가 달라지더니, 사망하자 온갖 욕설을 내게 퍼부어댔다. 환자의 시신이 영안실에 안치된 후에도 나는 그들을 피해 한동안 중환자실에 머물러있어야 했다. 담당 교수는 한 발짝 뒤로 물러선 채 방관만 하고 있었다. 급기야 유가족들은 의료사고라며 나를 경찰에 고소했다.
경찰 조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되새겨 보았다. '대체 내가 뭘 잘못했지?' 숨이 막혔다. 환자를 떠나보낸 아쉬움에, 보호자들로부터 받은 모멸감에, 담당 교수에 대한 섭섭함에, 더는 그 자리에 있고 싶지 않았다. 훌훌 버리고 떠났다.
3월 초, 계절은 어김없이 봄을 향해 나아갔지만 나는 여전히 살얼음판 위를 걷고 있었다. 무위도식 상태가 이어졌고, 사회적 소속이 없는 데서 오는 자괴감이 밀려왔다. 삶의 전환점이 필요했다. 나는 우연히 소개받은 충주의 한 병원에서 일하기로 했다. 그 병원의 병원장은 우리나라 신경외과 제5호 전문의인 칠순의 노의사였다. 1960년대 충주에 정착해 의료시설이 낙후된 지역 사회에서 크게 추앙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나날이 발전하는 의학을 따라가지 못해 의술은 정체되어 있었다.
원장을 보조하며 진료하던 중, 한 환자를 만났다. 막 스물을 넘긴 청년이었다. 결핵성 뇌막염으로 뇌척수액이 순환되지 않아 뇌압이 상승한 상태였다. 결핵치료제만 복용하던 그의 의식은 점점 나빠지고 있었다. 환자에 대한 원장의 질문에 나는 무심코 대답했다.
“빨리 뇌압을 감소시키는 시술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할 수 있습니다.”
순간 작년 말의 환자가 떠올랐다. 아차! 괜히 나선 건 아닐까. 하지만 처음 본 순간부터 그 환자는 내 마음을 붙잡고 있었다. 한창의 나이에 침대에 축 늘어져 있는 그에 대한 동정심일 수도 있고, 그는 몸의 병으로, 나는 마음의 병으로 절망의 늪에 빠져있다는 일종의 동병상련일 수도 있다.
대학병원이라면 문제없이 고쳐낼 환자였다. 하지만 원장에게 말해도 전원시킬 리 만무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보호자도 가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를 잃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 아직도 나는 의사였다.
검붉은 얼굴에 투박한 손, 환자의 아버지는 한눈에 봐도 전형적인 60대 농부였다. 막내아들의 나빠진 병세에 얼굴 주름이 더 깊어진 듯했다. 복도를 지나가다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환자의 형과 마주쳤다. 움푹 들어간 눈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한동안 머뭇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선생님, 제 동생은 이대로 죽는 건가요?”
가슴이 찡했다. 그들은 연로한 원장보다 나를 더 믿고 있는 듯했다.
응급 시술에 들어갔다. 환자의 이마를 통해 관을 꽂으려는 순간,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눈빛은 흐릿했지만 느낌은 강렬했다. 삶에 대한 열망이었다. 나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시술에 임했다. 무사히 시술을 마쳤지만, 이는 일시적 처치에 불과했다. 뇌실-복강 단락술이라는 수술이 필요했다. 원장은 이 또한 나에게 맡겼다.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환자는 회복했고, 가벼운 담소도 가능해졌다. 그런데 열흘쯤 지나자 환자의 의식이 다시 나빠지기 시작했다. 당황스러웠다. 검사해보니 재수술이 필요한 상태였다. 보호자들의 염원을 뒤로하고 나는 다시 그가 누워 있는 수술실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시간은 흐르고 원장 대신 나는 외래를 보는 중이었다. 한 청년이 환한 미소를 띠며 진료실에 들어왔다. 바로 그 청년이었다. 퇴원 후 두 달 만의 내원이었다. 살이 제법 오른 얼굴에는 생기가 넘쳐흘렀다. 왠지 그가 낯설게 보였다. 옆에 있던 그의 아버지도 흐뭇한 표정이었다. 그런 그들을 보면서, 연말 사건 이후 가슴 속을 짓누르고 있던 깊은 응어리도 풀렸다.
나는 운명의 힘을 믿는 편이다. 의사로서 살아가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더욱 그렇다. 이는 의사라는 한 개체로서의 인간이 어떻게 타인의 삶을 좌우할 수 있는가에 대한 자문자답이기도 하다. 의업에 종사한 후 포기했던 환자가 기적적으로 살아나는 것도 봤고, 확신했던 환자가 불가사의하게 죽어가는 것도 봤다. 조건이 동일한 환자들에게 같은 치료법을 적용했음에도 결과가 극명하게 달랐던 경험도 했다. 환자의 미래는 의사를 선택하기 전 이미 운명적으로 결정지어진 것은 아닐까. 어쩌면 의사는 신이 정해준 길을 가고 있는 한 인간의 인생 드라마에 스치듯 지나가는 비중 없는 조연은 아닐는지.
돌이켜보건대 그와의 만남은 운명이었다. 그와 나, 두 청년은 서로의 인생길에서 잠시 동행하며 상대의 아픔을 치유해 주었다. 서로에게 주치의였던 셈이다. 현재 나는 비뇨의학과 개원의로 나름 성실하게 살아가고 있다. 그가 건강하게 잘 살아가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지금쯤 40대 후반의 중년이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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