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호'가 될 순 없었나

입력
2021.04.02 04:30
26면

편집자주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생각해보니 우린 그냥 '실험 대상'이었던 것 같아요."

최근 전화 통화를 한 요양보호사 김모(58)씨는 이런 푸념을 털어놨다. 지난달 중순 아스트라제네카(AZ) 백신을 맞았다는 김씨는 "만성질환자가 많은 요양원에 근무하니 당연히 맞아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나니 묘한 배신감이 들더라"고 했다. 해외에선 없어서 못 맞는다는 코로나19 백신을, 상위 1% 순서로 맞게 된 그가 왜 배신감을 느꼈다는 것일까.

잠시 시간을 돌려보자. 국내 첫 코로나19 백신 접종을 앞두고 있던 2월 예상치 못한 변수가 발생했다. AZ 백신을 접종하기 시작한 유럽에서 고령층에 대한 효능 증명 자료가 충분치 않다는 논란이 불거진 것이다. 논란은 국내에도 옮겨 붙었다. 2월 10일 식품의약품안전처는 AZ 백신 사용 허가를 내며 "고령층엔 신중하게 결정하라"는 애매한 조건을 달아 불안감을 키웠고, 질병관리청은 첫 접종을 열흘 앞두고 AZ 백신을 65세 미만에만 접종하기로 결정했다.

정부는 영국에서 고령층을 포함해 1,000만 명 이상이 맞은 백신이라고 거듭 강조했지만, 국민들 입장에선 꺼림칙한 기분을 떨치기 어려웠다. 그래서 '1호 접종자'에게 더 관심이 쏠렸다. 우리도 이스라엘이나 체코, 터키처럼 정부 수반이 나서 국민적 신뢰를 높이고 동참을 호소하지 않겠냐는 전망에 무게가 실렸다. 정부의 선택은 예상을 빗나갔다. 1호 접종자를 별도로 선정하지 않고 2월 26일 오전 9시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접종을 시작하기로 한 것이다.

불안감이 고조되던 당시를 떠올리면 아쉬운 결정이 아닐 수 없다. 고위 공직자의 1호 접종은 불안 심리를 조금이라도 잠재울 수 있는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다른 나라와 달리 적어도 상반기까진 AZ 백신에 절대적으로 의존해야 하는 국내 상황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접종이 시작된 후에도 불안감은 계속됐다. △AZ 백신 접종 후 사망했다는 신고 △예상보다 심한 이상반응 △혈전을 유발한다는 논란 등이 잇따라 제기된 것이다. 유럽 일부 국가는 접종을 아예 중단하기도 했다.

그때까지도 정부에선 누구도 백신을 맞겠다 나서지 않았다. 문재인 대통령이 백신을 접종하겠다고 밝힌 것은 공교롭게도 일부나마 논란이 잠잠해진 후였다. 세계보건기구(WHO)와 유럽의약품청(EMA)은 지난달 12일과 18일 AZ 백신의 접종을 중단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을 밝혔고, 국내에선 같은 달 10일 65세 이상에 대한 접종 시행 결정이 내려졌다.

문 대통령이 백신을 맞자 정세균 국무총리와 권덕철 보건복지부 장관, 정은경 질병관리청장이 차례로 백신을 접종했다. 대통령은 해외 공무 출장으로 우선 접종 대상자였지만 나머지 인사들은 순서가 아닌데도 접종을 했다. 백신 안전성과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 솔선수범한다는 취지였다. 김씨는 "필요할 땐 뒤에 숨어 있다 백신이 부족해 양보해야 할 상황에 오히려 새치기를 한 꼴"이라고 말했다.

물론 동시다발 1호 접종도 가장 필요한 사람부터 빨리 맞도록 하겠다는, 나름의 메시지가 있었다. 대통령과 총리는 65세 이상이라 조기에 AZ 백신을 맞기 어려웠던 것도 사실이다. 한 여당 의원 말대로 '국가원수는 실험 대상이 아니니' 말이다. 다만 지난 한 달간 대신 실험 대상이 됐던 87만여 명의 국민들이 어떤 심정일지, 헤아려봤으면 하는 마음이다.

유환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