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계 펀드매니저 빌 황이 이끈 헤지펀드의 투자 실패로 이 펀드에 돈을 빌려준 월가 대형 투자은행(IB)들의 손실액이 애초 예상을 뛰어넘는 100억 달러에 달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왔다. 우리 돈 11조 원이 넘는 규모다. 이를 두고 "이 정도의 초고위험 파생상품에 베팅이 이뤄진 사실을 알지도, 막지도 못한 건 심각한 문제"란 비판이 연일 현지 언론을 오르내리고 있다.
특히 이번 사태가 당국의 규제 사각지대를 활용한 월가의 탐욕에서 빚어진 만큼, 현지에선 이번 '빌 황 쇼크'를 금융시장 규제 강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30일(현지시간) 블룸버그에 따르면 JP모건은 최근 빌 황이 촉발한 '아케고스캐피털 사태'에 따른 IB들의 손실액이 50억~100억 달러(약 5조6,500억~11조3,100억 원)에 달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는 애초 JP모건이 예상한 손실액(25억~50억 달러)보다 두 배 높은 추정치다.
특히 일본 최대 금융사인 노무라와 스위스 은행인 크레디트 스위스(CS)에 손실이 집중됐다. 앞서 노무라가 자사 손실액이 20억 달러라고 직접 밝힌 데 이어, 언론들이 CS가 최대 40억 달러 손실을 봤을 거라고 예상하자 이날 JP모건은 "모두 가능한 추정치"라고 밝혔다. 일본 미쓰비시UFJ 파이낸셜그룹도 이번 사태로 3억 달러가량의 손실이 났다는 사실이 전날 추가로 알려졌다.
현지 언론 등에 따르면 지난 26일 뉴욕증시에서 이뤄진 수십조 원 규모의 블록딜(대량 매매) 배후에는 '돈독'이 오를 대로 오른 글로벌 은행들의 탐욕이 있었다는 분석이다. 월가 은행들은 빌 황에게 증거금의 수십 배에 달하는 레버리지를 일으키는 차액결제거래(CFD) 형태의 계약을 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는 애초부터 기초자산이 되는 주식을 보유하지 않고 매매 거래를 하는 파생상품이다. 개별 종목 주가 하락 시 이번 사태처럼 대규모 반대매매가 쏟아질 가능성이 커 업계에서도 '미친 레버리지'라 불릴 정도로 위험성이 크다.
여기에 빌 황은 과거 내부자 거래로 월가의 블랙리스트에 이름을 올린 인물이다. 그는 2012년 내부자 정보를 이용한 중국계 은행 주식 거래 등으로 미 증권 당국으로부터 4,400만 달러(약 500억 원)의 벌금을 내는 등 사실상 월가에서 퇴출된 전력이 있다. 하지만 주요 은행들은 '큰손' 빌 황과의 거래로 챙길 수 있는 막대한 수수료 등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 때문에 현지에선 "IB들의 컴플라이언스(규제 준수·내부 통제) 실패"란 비판이 잇따른다. 블룸버그는 "불과 10년 전 내부자 거래로 기소된 전력이 있는 펀드매니저와 거래한 투자은행들의 오만함에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고 전했다.
빌 황 사태가 월가의 취약한 금융 시스템을 파고들었다는 지적도 나온다. 아케고스캐피털은 헤지펀드 전략을 취하는 '패밀리 오피스(가족 자산 등을 투자하는 운용사)'인데, 사실상 그 어떤 규제도 받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금융권 내에 현존하는 운용 전략 중 가장 자유로운 형태로 알려진 헤지펀드(1억 달러 이상 운용사)마저도 미 증권법에 따라 보유 지분의 변동사항 등을 공시해야 하지만, 패밀리 오피스는 각종 공시 의무에서 자유롭다.
이에 미국 민주당을 중심으로 범 헤지펀드 운용에 대한 규제 목소리가 고개를 들고 있다. '월가 저승사자'로 불리는 엘리자베스 워런 민주당 상원의원은 이날 CNN비즈니스 등에 "규제되지 않은 헤지펀드, 불투명한 파생상품, 높은 레버리지, SEC 규제망을 벗어난 거래란 모든 요소를 이번 아케고스 사태가 다 갖추고 있다"며 감독 강화를 촉구하고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