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어머니와 현관 비번 공유한다는 사실이 가장 충격"

입력
2021.04.01 04:30
16면
<42> 한국어 독학자들과 '청춘 방담'

편집자주

인도네시아 정부 공인 첫 자카르타 특파원과 함께하는 '비네카 퉁갈 이카(Bhinneka Tunggal Ikaㆍ다양성 속 통일)'의 생생한 현장.

여기 인도네시아 청춘들이 있다. 한국어 정규 교육을 받은 적은 없는데 한국어 실력은 유창하다. 요즘 우리들에게도 생소한 단어와 표현이 많은 한국 근대소설을 모국어인 인도네시아어로 번역해 최근 모두 상을 받았다. 직접 만나보니 저마다 사연과 생각이 쏠쏠하다. 한국을 배우는 이들은 우리 자산이자 평소 미처 깨닫지 못하거나 무심코 지나치는 우리 모습을 비추는 이국(異國)의 거울이다.

드라마 CD로만 한국어를 배운 고등학생 클라라(16)양, 엄마가 북한 사람인 외교관 지망 국립인도네시아대(UIㆍ우이) 대학원생 바유(24)씨, 영어강사를 꿈꾸며 빵을 굽는 호주 유학생 이네즈(29)씨와 2시간 방담했다. 이들이 풀어놓은 한국, 한국인을 소개한다. 다만 드라마 등 주로 한류 대중매체에 비친 한국(인)을 접한 점도 고려하길 바란다.

-한국어는 어떻게 배웠나.

클라라: "중학교 1학년 때부터 한국 드라마 해적판 CD를 사서 봤다. 한 장에 7,000루피아(약 550원)로 드라마 3, 4회 분량이 들어 있었다. 일주일에 세 개 드라마 전편을 몰아 봤다. 날 새운 적도 많다. 한국어가 너무 좋아서 영어 자막을 안 보고 들었다. 3년 뒤에야 귀가 열렸다. 지금까지 한국 드라마를 200편 이상 봤다(CD 개수는 800장이 넘는다). 한국 가수 앨범도 50장 넘게 소장하고 있다. 일상의 모든 생각을 한국어로 한다."

바유: "의사인 아버지는 인도네시아인, 간호사인 엄마는 북한인이다. 외교관으로 일한 할아버지와 함께 북한에 살다가 8세 때 인도네시아로 왔다. 안 쓰면 한국어를 잊을까 봐 역사책을 많이 읽었다. 한국 속담, 사자성어 등도 만화책으로 접했다. '미스터 션샤인'이 인생 드라마일 정도로 한국 역사 드라마를 좋아한다."

바유씨의 할아버지 가톳 윌로틱토(85)씨는 1960년 국비 유학생으로 북한에 갔다. 이듬해 수카르노 초대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했을 때 통역을 맡았다. 1965년 대학살로 수하르토가 정권을 잡으면서 귀국길이 막혔고 국적도 잃었다. 북한 여성과 결혼해 세 명의 자녀를 뒀다. 그는 수하르토가 물러나고 2년 후인 2000년 귀국했고 현재 한국에 살고 있다. 인도네시아의 대표적인 북한 전문가다.

이네즈: "영어강사가 되기 위해 호주로 유학 간 2010년 한국 예능에 푹 빠졌다. 영어 자막이 2주 뒤에 나오는 걸 기다릴 수 없었다. 자막 없이 보고 자막이 나오면 다시 봤다. 예습과 복습을 하니까 한국어 실력이 늘었다. 한국 유학생 언니, 오빠들에게도 배웠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때문에 작년에 귀국했는데, 인도네시아어보다 한국어나 영어가 편하다."

-혼자 공부하기에 어려웠던 점은.

클라라: "줄임말, 신조어가 특히 어렵다. 그때마다 한국 포털 사이트에 들어가서 뜻과 쓰임새를 다 찾아봤다."

바유: "문법, 띄어쓰기가 어렵다. 인도네시아어는 알파벳 발음(영어와는 조금 다르다)대로 읽으면 되는데 한국어는 여러 받침이 있으니까 헷갈린다. 한자를 안 배워서 한자로 된 단어 뜻풀이가 쉽지 않다."

이네즈: "문화가 달라서인지 고모, 이모, 큰아버지, 작은아버지 같은 호칭이 어렵다."

-근대소설은 한국 사람도 읽기 버거운데, 번역은 어떻게 했나.

클라라: "번역기는 사용하지 않고 사전을 찾아봤다. 인도네시아어로 표현할 수 없는 단어나 고어(古語)는 포털 사이트를 검색했다. 예컨대 인도네시아에는 없는 '지게'라는 단어 때문에 애먹었다."

바유: "솔직히 모르는 단어는 거의 없었다. 문화적 차이로 뜻이 와 닿지 않은 단어는 민족대백과사전에서 뜻을 찾았다."

이네즈: "번역기를 쓰긴 했는데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인터넷 블로그에서 교사들이 정리한 작품 해석을 참고했다."

-한국(인)의 장점은.

클라라: "다양한 방법으로 어려운 이웃을 돕는 모습이 멋지다. 코로나19 때문에 다들 힘들 텐데 농민들이나 상인들을 먼저 생각하는 것 같다. 국산 농산물이나 국산품에 대한 자부심도 강하다. 아, 사계절도 부럽다."

바유: "정부가 잘못하면 언제든지 집회를 해서 바로잡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그만큼 자부심과 긍지가 강하다는 뜻이고 그 덕분에 발전한 것 같다. 다만 잘못을 용서하고 다시 기회를 주는 일에 조금 인색하다. 반면 인도네시아는 너무 쉽게 용서한다. 부정부패로 감옥에 간 사람들이 손 흔들고 웃으며 나온다."

이네즈: "초등학생도 소설을 100편씩 읽는 등 독서 문화가 부럽다. 중·고등학교 때는 작가를 연구하고 소설을 공부한다고 들었다. 인도네시아에선 그렇게 독서를 시키거나 소설을 가르치지 않는다. 역사도 열심히 가르치고 또 많이 안다고 하더라. 우리는 역사를 배워도 사실 공감이 안 된다."

-한국(인)의 단점은.

클라라: "꼰대 문화다. '나 때는 말이야'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간섭하는 게 잘 이해가 안 된다. 인도네시아에선 어른들이 아이들 말을 잘 들어주고 존중하는 편이다. 동거 문화에 대해서도 부정적이다. 결혼 전에 임신하면 어떡하나."

바유: "식당 등에서 종업원을 부를 때 '어이~' 하는 게 거슬린다. '잠깐 와 주시겠어요'라고 해도 될 텐데 그렇게 하지 않더라. 특히 동남아 사람들을 홀대하는 분위기가 느껴진다. 인간의 존엄성은 직업이나 국적에 상관없이 모두 다 동일한 것 아닌가. 물론 한국인이 다 그렇지는 않다. 상사 눈치를 봐야 하는 음주 문화도 불편하다. 인도네시아에선 어른들과 술 마시는 게 편하고 즐겁다. 한국인들을 바닷속 물고기에 비유하고 싶다. 멈추면 죽는다고 여기는 것처럼 보인다.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일하는 건 나무랄 일이 아니지만 그 정도가 강박처럼 느껴진다."

이네즈: "고부 갈등과 장서 갈등이다. 시어머니나 장모와 아파트 현관문 비밀번호를 공유한다는 얘기를 듣고 충격 받았다. 가부장적인 시아버지 때문에 이혼한 한국인 지인도 두세 명 있다. 어떤 언니는 스트레스를 피해 호주로 왔는데도 매일 시댁에 전화해야 하는 처지였다. 명절마다 남편 집부터 가서 종일 요리하고 김장 때도 가야 하고 'K며느리' 삶이 고단해 보인다. '첫째 사위는 의사고 돈도 많이 버는데 자네는 뭔가'처럼 항상 비교당하는 사위들도 힘들겠다. 혼수 때문에 파혼한 한국 친구도 봤다. 정이 많은 반면 한번 잘못하거나 사이가 틀어지면 절교처럼 영영 안 보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조심스럽다."

-한국에 가 봤나.

클라라: "가려고 적금을 붓고 있는데 코로나19 때문에 용돈이 깎였다. 현재 1,000만 루피아(약 80만 원) 모았다. 강릉에 꼭 가보고 싶다. 쇼핑도 하고 카페도 가고 춘천 닭갈비도 먹고 싶다."

바유: "2013년에 할아버지 뵈러 잠깐 놀러 갔다. 서울 명동과 경기 평택시를 다녀왔다."

이네즈: "맛의 고장 전주에 가고 싶다."

이들은 올 1월 인도네시아 주재 한국문화원이 처음 마련한 '한국문학 번역자 발굴 공모전'에 도전했다. 한국어 전공(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과 비(非)전공(김유정의 '봄봄') 부문 중 후자에 지원했다. 63명이 참가한 공모전은 서면 심사, 인도네시아 대학 교수들의 번역작품 평가, 온라인 면접 순으로 이뤄졌다. 최근 세 사람을 포함해 12명(부문별 6명)이 수상자로 뽑혔다. 저마다 "1등이 목표"라던 세 사람 중에 실제 1등이 있다. 클라라양은 최연소 수상자다.

김용운 문화원장은 "근대소설 번역은 한국 문학이 한류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길 소망하는 취지"라며 "기대보다 높은 번역 수준에 놀랐다"고 했다. 수상자들은 한국문화원이 추진하는 번역 사업에 참여하게 된다.

세 사람은 한국어를 더 공부해서 "시장에서 일하는 엄마에게 가게를 차려 주고"(클라라), "외교관이 돼서 한국에 가고"(바유), "기회가 되면 한국어를 가르치고"(이네즈) 싶다. 이들의 인식이 한국(인)을 바라보는 인도네시아 전체의 시선이라고는 볼 수 없다. 한국을 배우려는 마음은 한결같으니 대중매체 탓에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은 진짜 만남을 통해 차차 제대로 알게 될 것이다. 이들을 응원한다.

자카르타= 고찬유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