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이정은은 영화 ‘자산어보’(31일 개봉)에서 흑산도 여인 가거댁을 연기했다. 신유박해로 한성에서 유배 온 문신 정약전(설경구)에게 호감을 보이는 인물이다. 튀지 않는 인물인데 사람과 사람, 이야기와 이야기를 이어주는 고리 같은 역할을 한다. 이정은은 가거댁의 임무에 맞게 장면을 주도하지 않으면서 상대 배우의 연기 리듬에 호응한다.
최근 화상으로 만난 설경구는 이런 이정은을 “대학(한양대 연극영화학과) 시절부터 자연스러운 연기의 대가였다”고 평가했다. 연기는 작위적이지 않아야 좋으니 ‘자연스러운 연기’는 그저 좋은 연기에 대한 표현에 불과할지 모른다. 하지만 ‘자산어보’를 보면 ‘자연스럽다’는 형용사가 이정은의 연기에 얼마나 들어맞는지 깨닫게 된다.
이정은을 언제부터 인지하게 됐는지 딱히 기억이 없다. 그는 여러 영화와 드라마에 얼굴을 잠깐씩 비추면서 익숙한 외모가 되더니 묵직한 중량감을 가진 배우로 우리 곁에 어느덧 다가와 있다. 이 또한 ‘자연스럽다’는 수식이 어울린다.
이정은의 스크린 이력은 오래 됐다. ‘와니와 준하’(2001)가 첫 출연 영화였다.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 준하(주진모)의 선배 역할로 잠시 등장했다. 지금 보면 그답지 않게 연기가 부자연스럽다. 아니나다를까. ‘카메라 울렁증’이 심해 ‘와니와 준하’를 촬영하며 애를 먹었고, 오랜 시간 영화와 드라마를 멀리하게 됐다고 한다. 그는 ‘마더’(2009)로 카메라 앞에 다시 서게 됐다. 살인 용의자 도준(원빈)의 엄마(김혜자)가 피해자의 장례식장을 찾는 장면에서 피해자의 친척 중 한 명을 연기했다. 이정은은 김혜자의 멱살을 잡고 거칠게 몰아세우는, 꽤 인상적인 모습을 보였으나 장면까지 훔치진 못했다. ‘택시운전사’(2017)를 보면서 비로소 그의 연기가 눈에 들어왔다. 이정은은 서울에서 온 택시운전사 만섭(송강호)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광주 택시운전사 황태술(유해진)의 처를 연기했다. 구수하고도 수줍은 사투리 대사가 마음을 훔쳤다.
다작을 하며 영화인들과 교류가 잦은 이준익 감독조차 ‘군함도’(2017)를 보기 전까진 이정은을 몰랐다고 한다. 이정은은 이 영화에서 친일 부인회 회장으로 한 장면만 나온다. 이 감독은 “쉽지 않은 연기를 인상적으로 잘해내는 걸 보고 기회가 되면 꼭 캐스팅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다졌다. 그는 “‘자산어보’를 준비하며 가거댁은 이정은밖에 맡을 사람이 없다”고 생각해 먼저 캐스팅된 설경구에게 의견을 물었다. 그의 반응은 이랬다고 한다. “대박!”
이정은은 ‘와니와 준하’ 이후 한동안 무대 활동에만 전념했다. 연극 기획과 연출을 하다 배우 신하균과 지진희, 우현 등 지인들에게 빚을 지기도 했다. 그는 한 방송프로그램에 출연해 연극하던 시절 ‘전대녀’라고 불린 사연을 털어놓았다. 돈 빌려준 사람들 이름이 적힌 수첩을 전대에 넣고 항상 허리춤에 차고 다녔다는 내용이었다. 자신에게 혹시 좋지 않은 일이 생기더라도 고마운 이들을 잊지 않았음을 알려주고 싶었다고 한다. 영화인들이 이정은을 “진심 있는 배우”라고 평가하는 이유를 알 만한 대목이다.
이정은의 진심은 연기에 임하는 자세로 표출되곤 한다. 그는 영화 ‘옥자’(2017)에서 유전자 조작으로 탄생한 ‘슈퍼 돼지’ 옥자의 목소리를 연기했다. 대사가 있는 건 아니고 그저 ‘꾸애액’ 소리를 여러 감정을 담아서 내야 했는데, 봉준호 감독에게 연기 제안을 받은 후 6개월 동안 동물소리 연구에 매달렸다고 한다. 이정은은 ‘내가 죽던 날’(2020)에서 성대를 다친 인물 순천댁을 연기하면서 영화 막바지에 쥐어 짜내는 듯한 목소리로 단 몇 마디만 한다. 후반작업 할 때 이정은의 짧은 대사를 다시 녹음하게 됐는데, 이정은은 연기에 도움이 될까 하는 마음에 헬륨가스 캔을 챙겨 왔다고 한다. 이준익 감독이 전해준 사연에서도 이정은의 철저한 연기 준비를 알 수 있다. “‘자산어보’ 촬영장 알아보러 전남 목포에 가 한 식당에서 밥을 먹는데 이정은에게서 ‘00식당에 있냐’는 문자메시지가 왔다. 화들짝 놀랐는데, 식당에서 일하는 사람이 자기 전라도 사투리 선생이라 했다. 촬영 전 일찌감치 현지인을 물색해 사투리를 익히고 있었던 거다.”
이정은은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2018)과 영화 ‘기생충’ 등으로 대중이 사랑하는 배우가 됐지만, 덜 알려진 드라마 ‘타인은 지옥이다’와 영화 ‘미성년’(2019) 등에서 선보인 연기도 되새겨 볼 만하다. 특히 ‘타인은 지옥이다’에서 “못 믿는 건 아닌데 나한테 기어오르는 건 못 참겠네”라고 말하며 의뭉스러우면서도 섬뜩한 표정을 짓는 모습은 뇌리에 오래 남는다. 그의 평범한 외모가 빚어내는 비범한 면모를 자주, 오래 보고 싶다.